교육당국의 학교폭력 근절 대책이 겉돌고 있다.
지난해 12월말 대구와 광주에서 친구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중학생이 잇따라 자살한 후 교육당국과 경찰은 대대적으로 학교폭력 근절 대책 마련에 나섰으나 불과 넉 달 만인 16일 영주의 Y중학교 이모(14)군이 학교 폭력으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학교 측이 이군에게 이상 징후를 처음 발견한 것은 지난해 5월24일이다. 학교측이 실시한'정서행동발달 심리검사'에서 이군은 정서불안 증세를 보여'자살 위험도 수치 고위험군'으로 판별됐다. 이군은 이에 따라 같은 해 12월까지 모두 열 한 차례의 병원 상담과 심리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2학년이 된 이군은 지난달 학급별로 실시된 학생생활조사 1차상담에서 "팬터지 소설을 그만 읽어라"는 지적만 받았다. 담임교사 조차도 이 군이 새 학기 들어 한 달 남짓 동안 같은 반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이 학교 김인규 교장 조차도 "이군은 지난 한해 동안 결석과 조퇴가 없고 지각은 한 번 뿐인 모범학생인데다 겨울방학을 거치면서 심리상태가 많이 안정된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물론 학교 측이 학교폭력 예방대책에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2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급식실에 앰프와 스크린 등을 설치, 외부강사를 초빙해 학년별로 폭력 및 자살예방교육을 실시했다. 지난달 20일부터 이달 13일까지 이 학교에서 실시된 범죄예방교실은 여섯 번이나 된다. 이군도 숨지기 사흘 전인 13일 교육을 받았다. 영주경찰서가 펼치고 있는 학교폭력예방 1만인 서명운동에도 이 학교 재학생의 절반이 넘는 340명이 10일 서명했다. 이군의 자필서명도 그대로 남아있지만 학급에서 이군을 괴롭혔던 A군은 정작 서명하지 않았다.
학교와 경찰 측이 폭력예방운동을 벌이던 지난달 초 이군은 이미 A군 등 친구 세 명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A군의 이름을 딴 모임 'OO패밀리'가 이 군을 포함해 다른 학생들에게 모임 가입을 강요했지만 학교측만 이를 모르고 있었다. 교육당국의 학교폭력 예방대책은 그저 형식적으로 헛구호에 그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현재 교육당국이 실시하고 있는 대책이 일선 학교 현장에서 제대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이 학교에서만 '자살 위험도 수치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학생은 모두 7명이나 된다. 이들에 대해 예산이 들더라도 전문 상담원이 붙어 장기간으로 각자에 맞는 맞춤식 상담과 교육을 실시하지 않고는 언제든 제2의 대구, 제3의 영주 중학생 자살사건이 재발할 가능성이 높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일단 이군의 자살로 충격에 빠진 Y중학교 학생들을 위한 보호 조치를 취하겠다고 17일 밝혔다. 경북도교육청도 뒤늦게 부교육감을 반장으로 특별대책반을 구성, 이 학교 학생 660여명을 위한 상담치유 전문인력을 파견해 집단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실시키로 했다. 학교측은 A군 등 가해학생 3명에 대해 출석정지 처분을 내렸다. 교과부 관계자는 "경찰이 수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에 따라 미비점이 발견되면 대책을 세울 방침"이라며 "학교에서 취한 학교폭력 예방 조치들이 적극적으로 이뤄진 것인지, 형식적으로 진행된 것인 파악, 제도적으로 보완이 필요하면 반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교육당국은 지난해 말 잇따른 중학생 자살 사건 후에도 학교폭력 긴급신고전화 개설, 학생상담 프로그램 등 많은 대책을 쏟아냈으나 결국 말 잔치에 그쳤다는 비난을 면키 힘들게 됐다. 영주의 한 학부모 박모(41ㆍ여)씨는 "교육 당국이 '학교폭력을 근절하라'는 사회적 압박에 떠밀려 각종 대책을 쏟아냈으나 결국 보여주기식 탁상 행정에 그치면서 아이 목숨 하나 지켜내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대구=전준호기자 jhjun@hk.co.kr
한준규기자 manb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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