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개(節槪)를 버린 신숙주(1417~1475)를 조롱해 '숙주나물'이 됐단다. 엄마가 아기를 으르는 "꼼쥐 온다!"는 말은 우는 아기만 보면 광기에 휘둘려 살려두지 않았던 임꺽정(?~1562) 도당의 두령 곽오주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말로 전해진다.
숙주나물이나 꼼쥐(곰쥐)처럼 오래 남을 악명이 될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요새 '용민 났다'는 우스갯말이 생겼다. 뜻밖의 처치 곤란한 장애나 황당한 훼방꾼이 나타나 다 된 일을 엉망진창으로 망쳤다는 의미다. 지난 총선에서 야권연대의 '다 된 밥상'을 '막말 파문'으로 뒤엎어 버린 '나꼼수'의 김용민씨를 빗댄 말일 터다. 누굴 저주할 땐 "귀신 다 어디 갔나, 저 놈 안 잡아 가고" 대신, "아이고, 용민아 이 재수 없는 놈 어디 갔나, 저 놈 앞에 안 나타나고"하는 식으로도 쓰이는 모양이다.
농담 속에 불과 수백에서 일천여 표 차이로 당선의 고지에서 피눈물과 함께 스러진 야권 후보들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막판에 뒤집힌 지역구 중 15석만 지켰어도 야권연대 155석, 새누리당 137석으로 판세가 바뀌었을 거라는 계산이니, 그 안타까움이 오죽하랴. 그런 심정으로 보면 '막말 파문'은 도도했던 민심의 장강(長江)에 느닷없이 떠오른 거대한 분뇨 덩어리였던 건 분명하다.
그런데 김용민씨만 아니었다면 야권이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극복해낼 대안세력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는 데 문제가 없었던 걸까. 선거 후에 차분히 제기되는 비판과, 여전히 우왕좌왕하는 민주통합당의 현주소를 보면 역시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데에 있었던 게 분명해 보인다.
정치공학적인 계산을 접어둘 경우, 지난 총선에서 차기 대안세력으로서 국민 다수의 신뢰를 좌우한 관건은 경제정책이었다. 하지만 민주통합당의 경제정책은 합리성과 실현 가능성, 비전 등 모든 면에서 신뢰를 얻지 못했다. 야권 연대를 모색하면서 재벌정책은 강퍅한 공격 구호로 전락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입장은 오락가락했고, 복지와 조세정책은 뜬구름 잡는 얘기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러다 보니 내세울 거라곤 김 빠진 'MB정권 심판론'밖에 없었던 것이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체제가 더욱 공고해진 만큼, 야권에서도 국민이 믿고 선택할 만한 대안체제가 조기에 구축되길 바란다. 누구 편이라서가 아니라, 남은 대선에선 '덜 나쁜 선택'을 해야 하는 고통보다는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보람을 거두고 싶기 때문이다.
야권의 대선 주자가 누가 될지는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하지만 경제정책을 어떻게 세우고, 대안체제의 정체성을 어떻게 구축하는 게 보다 넓은 신뢰기반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지난 총선에서 확인됐다고 본다.
우선 재벌정책은 개혁의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재벌 타도'식의 안일한 수준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세계체제' 속에서 우리 기업의 대외 경쟁력을 유지ㆍ강화하면서도, 국내적으론 대ㆍ중소기업의 공영과 공정한 산업질서를 강화하는 방향의 구체적 대안이 필요하다. 한미 FTA는 재재협상을 추진하더라도 취약 산업의 지원 및 육성책이 강구돼야 한다.
복지는 확대가 대세지만 재원과 관련해 납득할 만한 조세정책과 맞물려 제시돼야 한다. 실업자에게 천 만원씩 돈을 뿌리기 위해 급여생활자들의 조세감면을 대폭 줄이는 식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야권의 정책 담론은 그 동안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교수, 홍종학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당선자 등이 한 축을 이룬 가운데, 김상조 서울대 교수나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 등이 중도적 비판과 대안을 내놓는 식으로 흘러왔다. 여기에 최고위 경제관료 출신인 김진표, 정세균, 이용섭 의원 등이 현실적 균형추 역할을 자임하는 형편이다. 야권 대선 주자가 누가 되든 이들로부터 경제정책의 큰 틀이 하루 빨리 잡혀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용민이'가 향후 새누리당 쪽에 출현한다고 해도 승기를 잡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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