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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흑백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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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흑백의 방

입력
2012.04.17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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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로 이젠 국내에도 이름이 제법 알려진 일본 여성추리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로 최근 국내 번역 출간된 <흑백> 에는 흥미로운 공간이 나온다. 흑백의 방(房)이다. 에도시대(1603~1867) 도쿄 간다 미시마초에'미시야마'란 주머니 가게를 열어 제법 성공한 주인 이헤에가 집 안뜰에 면해 있는 외딴방에 이런 이름을 지었다. 제법 멋까지 부린 이곳은 말 그대로 주인이 친구들을 초대해 흑백 돌로 일합을 겨루는 바둑 두는 방이다. 일종의 싸움터인 셈이다.

■ 어느 날 어디서 날아와 뜰에 뿌리를 내렸는지 모를 만주사화(曼珠沙華)가 피고, 고향에 살던 열일곱 살 난 여자 조카가 혼자 가슴에 큰 상처를 입은 채 작은 아버지 집에 의탁하러 오면서 방의 쓰임새도 달라진다. 수선화과의 만주사화의 다른 이름은 석산(石蒜)이다. 춘분과 추분 일주일 전후에 피는 꽃(피안화)이 피처럼 붉고 묘지에 많이 있어 사인화(死人花), 꽃이 진 뒤에야 잎이 나와 '잎을 보지 못하고, 꽃을 보지 못하고'등 별명이 50개나 넘는다.

■ 그러나'감정 없는 사람에게는 운치를 감추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그 운치를 드러낸다'는 에도시대 한 가인의 말처럼 사람 마음의 정도에 따라 느낌도 다른 법. 일본의 카가미네 린과 야마구치 모모는 물론 홍콩의 매염방까지 붉은 색, 무덤, 혀의 곡선, 독(毒)의 불길한 꽃의 이미지에서 애틋한 사랑과 이별, 그로 인한 상처와 아픔, 연민을 절절하게 노래했다. 소설의 '흑백의 방'주인 역시 만주사화와 그것과 닮은 조카를 보며 다른 느낌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 '흑백의 방'은 더 이상 승부를 다투는 방이 아니라, 그곳에서 사람들이 조카에게 들려주는 세상에 일어난 일의 흑과 백을 견주어보는 방이 된다. 이기주의로 형을 죽게 한 동생, 모욕으로 살인을 저지른 청년도 찾아온다. 진정 마음을 열고 그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듣다 보면 주인의 말처럼 "백은 백, 흑은 흑이 아니라 관점을 바꾸면 색깔도 바뀌어 그 틈새의 색깔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설 <흑백> 이 굳이 이런 방까지 만들어 '듣는'것도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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