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54ㆍ본명 안재찬) 시인이 16년 만에 새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꽃> (문학의숲 발행)을 펴냈다. 1990년대 국내 문학 시장을 풍미했던 밀리언셀러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1991),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1996)을 잇는 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출판사 측 설명에 따르면 시인은 지난 2년 간 집중적으로 시작(詩作)에 몰두해 350여 편을 썼고, 그 중 56편을 이번 시집에 묶었다. 수록시 중 일부는 지난해 상반기 그의 트위터를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외눈박이> 그대가> 나의>
어느덧 지천명을 넘어선 시인의 시에는 지난 삶에 대한 회고가 두드러진다. '가족력은 방랑이었다'고 말하는 '자화상'이나 죽음 충동에 사로잡혔던 젊은 날을 돌아보는 '화양연화'처럼, 그 회고는 격렬한 자기 고백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시인은 그러나 '해탈은 멀고 허무는 가까웠지만/ 후회는 없었'다고 노래한다.('바람의 찻집에서'에서) '이제 말하련다, 보리여/ 처마에서 떨어지는 눈 녹은 물처럼/ 나는 견자가 되지 못하고 고백자가 되었다/ 생의 흔들림을 시에 맡기고/ 고작 별똥별이나 반딧불이 정도의 사상밖에 노래하지 못하면서'('보리'에서) '고작'이라는 반어적 표현에서 '별똥별이나 반딧불이' 같은 우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온 삶에 대한 시인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내가 죽어서 땅에 묻히면/ 내 혼도 모로 눕겠다/ 저쪽 세계로 가서/ 한 손으로 시를 지어야 하니까'('모로 돌아누우며 귓속에 담긴 별들 쏟아 내다'에서)
시인은 80년대 말부터 1년 중 4~5개월은 인도 티베트 네팔 등지를 떠돌고 있다. 유랑의 삶이 그에게 줄곧 소중한 시의 자양분이 되고 있음을 물론이다. '나무는 페러/ 연못은 탈라브/ 운명은 바갸/ 작별은 비다이/ 당신을 사랑해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런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라고'('옛 수첩에는 아직'에서) 둥근 눈의 인도 여자가 시적 화자에게 그 나라의 낯선 단어들과 더불어 사랑의 본뜻을 넌지시 일러준다. 당나귀에 몸을 싣고 북인도 라다크의 고산지대를 통과하는 것은 '내가 나를 타고 가는 것 같은/ 내가 나를 지고 가는 것 같은' 초월적 경험이다.('당나귀'에서) 원거리 이동에 지친 족속들에게 인간의 소금을 얻어 먹이려 스스로 사냥감이 되는 툰드라 순록의 자기 희생('순록으로 기억하다')도 길 위에서 얻은 이야기일 듯.
본인의 창작 의도와는 무관하게 근사한 연애시로 읽히곤 하는 시인의 서정시가 이번 시집에도 여러 편이다. '어느 생에선가 내가/ 몇 번이나/ 당신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선 것을/ 이 모란이 안다/ 겹겹의 꽃잎마다 머뭇거림이 머물러 있다// 당신은 본 적 없겠지만/ 가끔 내 심장은 바닥에 떨어진 모란의 붉은 잎이다/ 돌 위에 흩어져서도 사흘은 더/ 눈이 아픈'('모란의 연'에서)
앞선 시집들이 그랬듯 이번 시집은 독자들에게 즉각적이고도 폭넓은 공감을 끌어낼 만하다. 이 대중적 소구력은 평이하고 정갈한 시어와 난해하지 않은 비유, 시적 소재의 현실적 맥락을 지워 추상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정서를 빚어내는 특유의 작법에서 비롯한다.(이는 반대로 시인에 대한 박한 평가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세기를 건너 돌아온 류시화 시집이 시를 읽지 않는 시대의 독자들을 능히 휘어잡을 수 있을까. '흉터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이것도 꽃이었으니/ 비록 빨리 피었다 졌을지라도/ 상처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눈부시게 꽃물을 밀어 올렸으니/ 비록 눈물로 졌을지라도'('옹이'에서)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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