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성시 보개산 자락에 자리잡은 이강소(69) 화백의 작업실은 호젓했다. 서울서 멀지 않은 곳이지만, 비포장도로로 들어서자 내비게이션은 먹통이 됐다. 다행히 어귀에 선 느티나무가 이정표가 돼주었다. 무심코 밟은 맨홀 뚜껑에도 그의 화재(畵材)인 나룻배가 조각돼 있을 정도로 곳곳엔 그의 40년 화업이 응축되어 있었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자연 속에서 작업에 몰두하는 그를 지난 12일 안성 작업실에서 만났다.
이씨는 말간 캔버스 위를 유영하는 회색 혹은 청회색의 오리 그림으로 '오리 화가'로 불린다. 그러나 젊은 시절엔 파격과 실험성으로 유명했다. 1973년 서울 안국동 명동화랑을 선술집으로 바꾼 '소멸, 선술집' 퍼포먼스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미술계에서 회자된다. 작품을 감상하러 온 관객들에게 막걸리 한 잔씩 들이켜게 했던 퍼포먼스에 사용된 소품은 실제 선술집에서 가져왔다. 안성 작업실 한켠엔 지금도 이들 소품이 자리하고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지요. 만물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은 우주의 섭리입니다. '소멸, 선술집' 역시 그것을 말하고 있지요. 사람과 술과 떠들썩한 소리가 있었지만 다 지워지고 없지 않습니까. 다만 온몸으로 인지된 기운만은 남아있게 마련이죠."
퍼포먼스, 회화, 조각, 사진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표현의 한계를 실험하던 그가 캔버스에 간결한 붓질의 오리와 나룻배, 사슴 등을 그린 것은 80년대 들어서다. 의도하지 않은 듯한 무심함, 사유가 개입할 틈도 허락하지 않는 찰나의 붓질은 단순한 선과 점이 되어 캔버스를 가로지른다. 조각도 마찬가지, 여러 종류의 흙을 배합한 토련기에서 흙덩어리가 나오기 무섭게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인위적으로 다듬는 과정을 최소화한 채 생성된 형태를 그대로 가마에 구워낸다. 작업 과정이 일종의 퍼포먼스다.
그는 2008년부터 회화에서 '허(虛-Emptiness)' 연작을 통해 정신적 표현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즈음 그린 대형 작품 두 점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그룹전 '한국의 단색화'전(5월 13일까지)에 걸렸다. 이우환, 박서보 등 구상성을 배제하고 단색의 추상화를 그리는 30명의 화가와 함께하는 전시다. 전시를 기획한 미술평론가 윤진섭씨는 "한국 단색화 작가들에게 나타나는 반복적인 선과 점은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상태의 지향을 의미한다"며 "이강소 화백 역시 40년에 걸쳐 이룩한 마음의 풍경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허'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씨의 캔버스에는 여백이 많아지고 색채 역시 검정과 회색으로 단순해지고 있다. 그는 그림 속 빈 공간을 굳이 여백이 아닌 '공백'이라고 고쳐 말했다. "그림을 그리고 남은 곳이 아니라 최대한 표현을 단순화하며 비워둔 자리이기 때문이에요. 색채를 줄여가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나를 줄여가면서 관객들이 상상할 여지를 더 늘려가고 싶은 거죠." 마음이 가는 대로 그려낸 붓질을 누군가는 구름으로, 누군가는 오리로, 누군가는 캔버스에 투영된 노 화백 마음속 풍경으로 보아주면 그만인 것이다.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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