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도 이런 조폭은 없을 겁니다. 저희 기술을 탐낸 대기업들이 짜고 달려들어 회사를 단숨에 거덜냈습니다."
벤처기업인 윤모(45)씨. 그는 3년 전까지만 해도 구글이 부럽지 않았다. 30대 후반이던 2004년 그는 지도 기반 검색 광고 회사를 차렸다. 인터넷 지도 상에서 특정 장소를 검색해 클릭하면 바로 무료전화를 걸어 연결해 주는 서비스를 개발했는데, 국내외에 특허를 출원해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어갔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시련이 찾아왔다. 2008년 한 거래처 대기업 임원이 평소 많이 도와줬으니 회사 지분의 절반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윤씨가 거절하자, 그 임원은 이듬해 거래관계를 모두 끊어버렸다. 이어 계약을 맺고 있던 다른 국내 대기업들도 약속이나 한 듯 줄줄이 계약 해지를 통보해 왔다.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회사 임직원들이 거래처와 짜고 기술을 빼돌려 문제의 대기업으로 이직하거나, 따로 회사를 차려 사업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회사 실적이 곤두박질치자 30억 원을 투자했던 대기업 계열 벤처투자사까지 나섰다. 회사 대표이사인 윤씨에게 회사 지분 포기 각서를 집요하게 요구한 것이다. 윤씨는 1년을 버티다 결국 각서를 써 줬다. 그는 알토란 같은 회사가 인력과 기술을 다 빼앗기고 허망하게 무너지는 건 잠깐이었다고 말했다.
윤씨의 기막힌 사연을 소개한 연유는 그의 스토리가 한국 중소ㆍ벤처기업들이 흔히 겪는 문제들의 종합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두말할 것 없이 인력ㆍ기술 빼가기만큼 큰 범죄도, 반기업적인 행위도 없다. 하지만 이런 일이 대표적인 국내 글로벌 기업들 사이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게 현실이다. 이러니 갑을 관계로 족쇄처럼 묶여있는 대ㆍ중소기업 사이에선 그 실상이 어떠할 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벤처기업을 성공적으로 일궈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의 한국경제 진단은 그래서 눈길을 끈다. 그는 최근 한국 경제를 '좀비 경제'라고 명명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상대로 하는 (약탈 및 불공정) 행위를 정부가 방조해 중소기업들은 살아있으나 시체나 다름 없는 좀비처럼 됐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전에도 대ㆍ중소기업 사이의 하청관계를 "마치 동물원에 집어 넣고 일만 시키고 말라 죽으면 또 다른 기업을 찾아 동물원에 집어넣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며 날을 세우기도 했다. 하청관계가 중소기업의 인력과 기술을 쥐어짜는 구조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안 교수의 진단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분명한 것은 국내 대기업이 중소ㆍ벤처기업의 신기술을 제 값 주고 사거나, 기업 자체의 인수ㆍ합병(M&A)에 매우 인색하다는 점이다. 대신 하청을 주고 독점계약을 맺는 데만 열을 올리는 실정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처럼 유망 신생 벤처를 대기업이 천문학적 금액을 주고 샀다는 소식이 국내에서 드문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의 대부분은 중소기업과 관련돼 있다. 양극화나 청년실업 해소도 전체 기업의 99%, 고용의 88%를 차지하는 중소기업 부문을 활성화시켜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려면 벤처기업을 해서 떼돈 벌었다는 젊은 기업인들, 그들의 영웅적 스토리들이 우리 사회에 쏟아져 나오도록 해야 한다.
물론 그 전제 조건은 기술이든 인재든 중소기업을 상대로 한 약탈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일이다. 다시 말해 골방이나 창고에서 밤 잠을 설치며 어렵게 일군 혁신 기술에 대해 제 값을 쳐주는 일, 힘센 대기업이라도 뺏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풍토와 문화 조성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 것이 동반성장을 위한 대ㆍ중소기업 간 '성과공유제'못지 않게, 아니 더 절실하게 정부가 힘을 모아야 할 부분일지도 모른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조폭이라 부르는 나라에선 혁신도, 희망도 솟아날 리 없기 때문이다.
박진용 산업부 차장 hu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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