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의 일당지배체제는 일견 굳건한 듯 보이지만 1949년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 이래 정치적 사건에 휘말린 사례가 적지 않았다. 성공한 쿠데타가 없었을 뿐, 보시라이(薄熙來) 사태처럼 주요 격변기마다 공산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극심한 권력투쟁을 겪었다.
본격적인 노선 싸움은 문화대혁명(1966~76년)을 계기로 시작됐다. 마오쩌둥(毛澤東)의 급진 사회주의 실험에 맞서 대약진운동을 줄곧 비판한 펑더화이(彭德懷) 국방부장은 59년 기회주의자로 몰려 숙청당했다. 대약진운동의 참담한 실패와 함께 잠시 2선 후퇴한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 카드로 반전을 노렸다. 그는 권력 실세인 류사오치(劉少奇) 국가주석과 덩샤오핑(鄧小平) 총서기를 '유산계급과 우파 복원주의자'로 몰아붙였다.
71년엔 린뱌오(林彪) 부주석이 항공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린뱌오는 홍군 야전사령관 출신으로 69년 마오의 후계자로 내정됐지만 쿠데타를 도모하다 몽골로 도피 도중 숨졌다.
'4인방 사건'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마오의 세 번째 부인 장칭(江靑) 등 4인방은 문혁의 주역이었으나 76년 마오 사망 한 달 만에 국가 전복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축출됐으며 문혁도 10년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80년대부터는 개혁ㆍ개방 대 보수세력의 힘겨루기가 반복됐다. 81년 화궈펑(華國鋒) 당 주석을 몰아낸 덩샤오핑은 후야오방(胡耀邦)을 당 총서기에 앉히고 우파 주도의 개혁에 나섰으나 보수파의 반발에 부닥쳐야 했다.
89년 6월 발생한 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덩샤오핑이 사태 수습을 놓고 온건대응과 무력진압을 제시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와 리펑(李鵬) 총리 가운데 리펑의 손을 들어주었다. 자오쯔양은 이후 2005년 사망 때까지 가택연금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기술관료 출신으로 권력 기반이 약했던 장쩌민(江澤民)은 92년 막강한 군부 영향력을 과시했던 양상쿤(楊尙昆) 양바이밍(楊白氷) 형제를 자리에서 끌어내린 뒤 지배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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