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사교육만 배불리는 수시 논술전형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사교육만 배불리는 수시 논술전형

입력
2012.04.16 17:41
0 0

■ "대학생도 못 푸는 수리·과학 논술… 학원 다닐 수밖에 없어요"

서울 사립 S대 공학계열 1학년에 재학중인 신모(20)씨는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지난해 여름방학 동안 논술학원비로만 120만원을 썼다. 기본적인 글쓰기 첨삭 비용으로 40여만원, 수학과 과학 심화논술을 각각 40만원을 주고 배웠다. 그렇지만 논술을 치른 일부 대학의 수시전형에서 문제의 절반은 아예 손을 대지 못했다. 그는 "그나마 학교만 다닌 학생들 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고 말했다.

신씨는 "수년간 자연계열 대입 수시 논술 시험에서 함수, 집합 등 여러 수학개념을 복합한 고난도 문제를 출제하는 바람에 울며 겨자먹기로 학원을 다녔다"며 "고교 수업만 듣고 수능식 문제풀이에 익숙한 고3 학생 입장에서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대학식 수리논술 문제를 풀려면 학원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대학 논술고사가 본고사화하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더구나 전체 대학들의 수시모집 비중은 갈수록 늘어 최근 60% 이상이 됐다. 대다수 학생이 논술을 중심으로 하는 수시모집 전형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논술 중심 전형이 어려워지고 비중이 커지면서 결국 학생들은 학원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김성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수학사교육포럼 부대표는 "수학과 과학 논술을 실시하는 자연계열의 논술고사에서 특히 이런 현상이 뚜렷하다"고 말했다. 세종과학고, 한성과학고 등에서 수학교사로 10년여간 재직했던 최수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수학사교육포럼 공동대표 역시 2012학년도 연세대 수시모집 자연계열 논술 시험지를 보다 깜짝 놀랐다. 제시문에 나온 기호들 자체가 매우 생소했고, 특히 일부 부등식은 대학 수학과 교재에나 등장할 법한 기호라, "과연 학생들이 문제나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는 "중고등학교 교과서로만 공부한 학생들이 손을 대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꼬집었다.

인문계열 논술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고교 사회과에서는 전혀 찾아보기 어려운 이론들이 지문으로 버젓이 등장한다. 박기호 메가스터디 논술 강사는 "게임이론과 공유지의 비극, 채용과정에서의 과학적 관리법(연세대 기출), 공동자원 딜레마와 의사소통(성균관대 모의)등 최근 3년 사이 대학 논술에서 줄줄이 등장한 개념들은 모두 행동경제학, 경영학, 행정학 등 대학 전공 수준에서 등장하는 이론들"이라며 "학생들은 한마디로 '문제를 쳐다만 보고 나왔다'고 말한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 ▦사냥꾼 딜레마(한양대 2010학년도 수시2 인문) ▦늑대의 딜레마, 지속가능한 성장(동국대 2011학년도 수시1) ▦사회적 자본(퍼트넘), 사회적 신뢰(서강대 2011학년도 수시2차 인문계) 등도 모두 대학 수준의 이론에서 출제된 문제들이다. 그는 "특히 2시간 안에 이 문제를 풀어야 하는 고교생들은 당연히 학원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이라고 덧붙였다.

2006년 교육과학기술부가 본고사식 논술고사를 방지한다며 "딱 떨어지는 답이 있는 문제, 기존 교과과정을 넘어서는 문제는 제시할 수 없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지만 현실은 거꾸로인 셈.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종 심화논술을 지도하는 학원은 문전성시다. 수험생 시절 논술 사교육을 받고 서울 S대에 진학한 신모씨는 "유명 학원의 심화논술 강좌는 보통 접수 2일 내에 마감되고, 원하는 강사에게 수업을 들으려면 컴퓨터를 켜놓고 대기하다 바로 클릭해야 신청할 수 있다"며 "수능 이후에 벼락치기로 다니는 논술학원은 1주일에 수강료가 100만원 수준"이라고 말했다.

K대 공학부 1학년 김모(19)씨는 "학교에도 논술 수업이 있긴 하지만 교과서로 공부한 미적분 수준으로는 도저히 기출문제를 풀 수 없어, 고3시절 5개월간 1회 5만원짜리 심화 논술 학원을 다녔다"며 "지금 대학에서 배우는 미적분 수준에 비해서도 문제가 상당히 까다로웠다"고 말했다.

이영덕 대성학력개발연구소장은 "당국이 사교육비를 줄이겠다며 수능 난이도를 낮추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대학에서는 변별력을 확보하겠다며 대학 수준의 논술고사를 출제하니 학생 입장에서는 수능 수준으로 공부해서는 늘어난 수시모집에서 합격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또 "본고사식 문제가 늘어나며 논술고사가 영어ㆍ수학을 깊이 배운 특목고생들에게 유리한 시험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말했다.

정승임기자 choni@hk.co.kr

■ 내신은 좋아봤자… 수능이 당락 좌우

대입 수시모집의 본래 취지는 수능성적을 주로 보는 정시모집에만 제한하지 않고, 고교 내신성적과 논술 중심으로 학생을 뽑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수시 전형을 수능성적이 안 좋아도 논술 준비만 열심히 하면 '역전'이 가능한 기회로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고난도 논술고사로 사교육 없이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가 하면, 겉으로 논술 전형이라고 해놓고 실제로는 수능 성적에 따라 당락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상위권 주요대학들은 수시모집 논술 중심 전형에서 학생부(내신) 성적을 20~60% 반영한다. 논술 성적은 40~80%의 비중이다. 하지만 대학들이 요구하는 최저 학력 기준이 너무 높아 실제로는 수능 우수자를 뽑는 전형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연세대와 고려대는 인문계 논술전형 중 수능우선선발 전형에서 언어, 수리, 외국어 모두 1등급을 요구한다. 이렇게 뽑는 선발 비율이 60~70%여서 결국 학생들은 논술과 수능을 모두 준비하지 않으면 합격하기가 쉽지 않다. 성균관대와 한양대도 인문계의 경우 언어, 수리, 외국어 영역의 등급합을 4 이내로 요구해 장벽이 높다. 입시기관인 이투스청솔이 2011학년도 수능 표본을 분석한 결과 언어, 수리, 외국어 영역에서 모두 1등급을 받은 비율은 1.4%에 불과했다.

수시 일반전형에서도 주요 대학들의 수능 요구 수준은 '언어, 수리, 외국어, 탐구의 4개 영역 가운데 2개 영역에서 2등급 이상'이다. 이에 해당하는 학생 역시 상위 14%에 불과할 정도로 기준선이 높다. 한 입시관계자는 "어떤 대학은 내신과 논술에서 상위권과 하위권 점수차를 좁게 만들어 변별력을 낮추고 사실상 수능으로 당락을 좌우하게끔 입시를 설계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논술전형과 일반전형을 가리지 않고 수능 기준을 어렵게 요구하면서도 이들을 수시에서 선발하는 것은 대학들이 우수 학생들을 정시 전에 수시지원을 하도록 해서 선점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입시 관계자는 "수시모집은 내신이 불리한 대신 학력 수준이 높은 특목고 출신 수험생들에게 유리한 구조"라며 "실제로 내신 성적만 믿고 수시 일반 전형에 지원했다가 수능 최저 기준을 채우지 못해 탈락하는 수험생이 매년 20~30%에 이르며, 이들은 대부분 일반고 출신 수험생들"이라고 설명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김승현 정책실장은 "이런 입시 전형하에서는 학교 정규수업과 평가의 질이 절대 높아질 수 없으며 사교육 문제 해결과 학교교육 정상화는 요원하다"고 지적했다.

한준규기자 manbo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