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구수난세(心垢水難洗), 마음의 때는 물로도 씻기가 어렵다…"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갈월종합사회복지관 6층 강의실.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 입은 노신사가 붉은 먹을 머금은 붓으로 체본을 한 자 한 자 써내려 가자 수강생들은 잔뜩 숨을 죽였다. '심구수난세'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신라 말기 문신 최치원이 쓴 '내 마음'이라는 시에 나오는 글귀인데, 다들 한번씩 써서 방에다 걸어 보세요. 그림 한 점 걸어 놓고 보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붓을 잡은 이는 철도공무원으로 43년을 보낸 뒤 1998년 정년 퇴직한 황무섭(75)씨다. 서예 강사로 인생 2막을 펼치며 '서예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인생 2막이라고? 1막이나 다름 없어. 공무원 할 때보다 더 정신 없다니까."
그의 불 같은 소리는 이어졌다. "예서, 초서, 행서를 가르치자면 지금 가르칠 수도 있어. 하지만 정서(해서, 진서)가 안되면 나중에 자기만의 서체가 안 나온다니까. 기본이 안되면 금방 무너져. 멋 내려고 하지 말고 기본에 충실 하세요."
공무원 출신이지만 황씨의 서예 솜씨는 전문가 수준이다. 국제미술작가협회, 한국국제문화협회, 국가보훈문화협회, 한국석봉미술협회 등의 단체가 주최하는 각종 대회에 초대작가,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다. 그는 "유교의 고장이자 선비의 고장인 경북 영주에서 한학으로 이름을 떨치던 조부(호암황영호) 아래서 자랐다"며 "그게 인생 막장에 와서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몰랐다"며 웃었다.
문하생으로 들어와 배우고 있는 은생기(70)씨는 "중국 문화혁명 이후 각종 서체들이 난립하는 바람에 중국에서조차도 정체로는 한국의 서체를 높이 평가해준다"며 "황 선생의 서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이런 명성 덕분에 황씨는 최근 성균관 유림서예작가회 초대 회장에 올랐다.
강단에 선 지 벌써 14년. 그간 그를 거쳐간 제자들은 헤아릴 수 없지만, 40여명은 등단해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황씨는 "각종 대회에서 입선하면 1점, 특선 3점 등으로 매겨 누적 15점 이상이 되면 작가라는 호칭이 붙는다"며 "서예 작가 등단에 보통 10년 정도 걸리는 걸 감안하면 기본이 된 분들이 학생 대다수"라고 했다.
서예를 가르치면서 느끼는 가장 아쉬운 대목은 한자에 대한 국민적 무관심이라고 했다. "한자를 대우하지는 못하더라도 천대까지 할 필요는 없죠. 요즘 외국어 외국어 하는데 중국말은 어디 외국어 아닙니까?" 중국이 성장하면서 한자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미국 같은 서양 국가보다 못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글을 쓰거나 말을 하면서 영어를 섞어 쓰면 유식하다고 하고, 한자를 섞어 쓰면 구식이라고 하니 이건 좀 아니에요. 요즘 세대들은 한자를 쉽게 접할 수 있어서 그런지 한자의 중요성을 잘 모르고 있어요. 한글 단어 대부분도 결국 한자에서 비롯된 만큼 한자를 공부하지 않는 학생의 이해력과 창의력은 한자를 공부한 학생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미국 등 서구에서 불고 있는 한자 서예 붐도 황씨의 관심거리다. "중국을 배우는 사람들이 중국의 매력 중 하나로 한자 서예를 꼽고 있어요. 일본은 '한자문화권'임을 내세워 한자 서예를 배우려는 서양인들을 흡수해 교육, 관광산업으로까지 연결한 다음에 수익을 올리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 서실엔 이렇게 퇴직한 분들만 오고 계시니…. 사는 게 각박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앞으로 서실에서 젊은 사람 구경 좀 했으면 좋겠어요."
글·사진 정민승기자 msj@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