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열(63) 환경재단 대표는 한국 환경운동의 역사이다. 그가 1982년 5월 1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에 시작한 최초의 민간환경단체인 한국공해문제연구소는 88년 공해추방운동연합으로, 93년에는 환경운동연합으로 진화했다. 그 사이 그는 공해로 인한 집단괴질을 고발하고 일회용품 안쓰기 운동과 쓰레기종량제, 자동차 요일별 운행제 등을 정착시켰다. 동강댐 백지화 같은 환경운동은 물론 2004년에는 총선물갈이연대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정치운동에도 적극 나서기도 했다. 2000년대를 주름잡은 유명한 사회운동가로 정계로 나아가지 않은 사람으로도 그가 유일하다. 2005년 환경재단 대표를 맡으면서는 환경운동의 기반 확충에 기여하는 대신 과거의 열렬한 현장운동에서는 몸을 빼는가 싶었는데 그가 요즘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용산공원을 개발하려는 정부의 계획을 막고 도심생태공원으로 만드는 일에 시민들의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한다. 그를 만나 야성(野性)의 DNA가 꿈틀거리는 요즘 이야기와 30주년 환경운동사도 들어보았다.
_이제 시민운동으로 돌아오는 건가요?
"우리나라가 300억평 서울이 2억평쯤 돼요. 용산 미군기지 자리가 100만평쯤 되는데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옮겨가면 용산공원을 만들자고 몇 년전부터 논의를 해왔어요. 그런데 한달 전쯤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가 큰일 났다고 달려왔어요. 환경전문가들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용산공원 기본설계에 대한 국제공모'를 국토해양부에서 냈는데 용산공원에 주상복합건물 대형쇼핑센터 놀이공원이 들어가고 용적률을 800%까지 넣겠다는 거예요. 당선작 발표를 4월23일 한다고 해요. 서울시민도 모르는 상태라 3월 24일에 박원순 서울시장을 우선 만났어요. 서울시장도 전혀 모르는 거예요. 국토해양부에 실무사업단이 있어서 서울시 사무관이 파견 나가있는데 시장한테까지는 보고가 안 올라온 거지요. 서울시장 제안으로 그 다음 주에 전문가들이 다시 한번 모였어요. 미군기지가 이전하면 원상태를 회복하자, 필요하지 않은 시설물은 만들지 말자, 기존의 시설물 가운데 쓸 건 쓰자, 이렇게 도심 속 자연생태공원을 만들자고 결론을 내렸어요. 국토해양부에서는 미군기지를 이전할 비용을 만들려면 주상복합 대형쇼핑센터를 지어야 한다는 건데 그런 식으로 할 바에는 공원을 하지 않는 게 낫지요. 박원순 시장은 천 년에 한번 올 수 있는 기회를 서울시민도 모른 채 졸속으로 할 수 있느냐고 화를 많이 냈어요. 그래서 서울시와 시민사회가 대안을 만들어서 개발을 막자고 합의를 했습니다. 뉴욕에 있는 센트럴 파크도 뉴욕땅인지 국유지인지 몰라도 각계각층 사람들이 모금하고 시민들이 벤치를 기증도 하고 해서 만들어낸 거거든요. 서울시민들이 갖고 있는 저력이면 우리도 할 수 있어요. 캐나다의 스탠리파크는 원시림을 그대로 보존을 해놨어요. 원시림까지는 몰라도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최적의 공원을 만들자는 건 보수적인 사람들도 다 동의를 했어요. 그런데 몇 년 사이에 그게 완전히 개발로 바뀌어서 국제공모까지 나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에요."
_이제라도 바꿀 수 있을까요?
"그럼요. 시민운동으로 동강댐을 백지화시켰잖아요. 댐이 만들어지면 지역주민들이 생업을 잃으니까 적극적으로 참여했고요. 환경단체가 동참해서 전국적인 이슈를 만들었지요. 결국 김진선 당시 강원도 지사가 백지화를 발표했지요. 지자체장이 결심해주면 정부계획을 바꾸는 시민운동에 힘이 실리지요. 박원순 서울시장도 반대하고 미군기지 이전도 시간이 있어요. 우선 국제공모 계획을 확정하는 것부터 막고 차근차근 시민들이 원하는 공원이 무엇인지, 다음 정부는 어떻게 할 것인지 대선 화두로도 등장하면 개선 가능성은 있습니다."
_올해가 환경운동을 시작한 지 30년이지요.
"82년 5월 1일에 혜화동로터리에 실평수로 6평? 아마 요거 (환경재단 대표 방) 비슷할 거에요. 한국공해문제연구소라고 열었어요. 그 해 3월 6일날 결혼하고 용산구 이촌동 아파트에 살았는데 원래는 4월 1일날 집에다 열고 세 사람이 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집에서 하니까 일이 안 되는 거예요. 당시 분위기에서 그런 공간이 있으니까 민주화 운동하는 사람들도 다 모이는 자리가 됐어요. 민청련도 그 사무실에서 준비를 많이 했어요. 공해문제만 연구한다는데도 정부에서는 반정부 운동하는 데라고 생각해서 기관원을 상주시켰고 환경청 사람들은 정부가 있는데 민간단체가 뭐가 필요햐냐, 정부기구에 들어와서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회유도 했습니다."
_그런데 진짜로 정치운동은 아니고 환경운동만 하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제가 75년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안양교도소로 갔는데 거기에 긴급조치 위반자가 45명 있었어요. 나가면 무얼 할 거냐 그러면 다들 노동운동을 한다고 해요. 저만이라도 다른 걸 하자 싶어서 전공이 화학(강원대 농화학과)이라 공해 반대를 하겠다 했지요.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은 다음에 공해지' '민주화가 먼저지' 그래요. 그때 제 뜻을 이해해 준 사람은 김지하 선배하고 안양교도소 있을 때 제 옆 방에 있던 이부영 선배 두 사람 뿐이었어요. 당시는 한국책이 없어서 옥중에서 일본어 공부부터 시작해서 4년동안 공해 관련 책을 250권쯤 읽었어요. 책을 보니까 이게 오염의 문제만은 아니고 생태계 전반을 아우르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싶었어요."
_그런데 왜 이름은 공해문제연구소로 지었어요?
"80년에 환경청이 생기기 전에 보사부 공해과였어요. 언론도 환경이라는 말을 안 쓸 때라. 88년에 공해추방운동연합으로 만들었다가 93년에 8개 환경단체가 모여서 환경운동연합을 만들면서 그제야 환경을 이름에 붙이자고 했더니 실무진들은 공해추방운동연합이 많이 알려져 있는데 왜 그러냐고 했을 정도거든요. 초창기에는 공장의 오염물질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와 식품 안전성 문제를 주로 다뤘어요. 시민강연이랑 현장조사를 많이 했어요. 당시 안양천 중량천 같은 데 가면 5, 6월. 갈수기에는 물이 단팥죽 끓듯이 부글부글 끓어요. 주변에 피혁공장 도금공장 염색공장이 많아서 오염물질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주변 판자촌은 수도가 없으니까 하천에 파이프를 꼽아서 그걸로 생활을 해요. 자갈로 걸러 써도 밥을 하면 화공약품 냄새가 나서 냄새를 빼고 먹기도 하고요. 85년에 울산 아래 있는 온산공단 주변에서 중금속으로 인한 집단괴질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온산병'이라 명명했는데 이걸 1월 18일에 신문들이, 특히 한국일보가 제일 먼저 가장 크게 보도해주면서 크게 알려지게 됐지요. 공단을 만들 때 주민을 이주시키면 돈이 많이 드니까 마을과 마을 사이에 고려아연 동해펄프 같은 중금속 배출공장이 84년에 13개나 들어섰어요. 당시 조사해보니 주민 1만여명 중에 700여명이 뼈가 아픈 병에 걸렸어요. 조개 뻘 토양을 조사해보니 구리 아연 납 카드뮴이 기준치의 10배 내지 100배가 나왔어요. 그런데도 환경청은 아니다 그러고 결국 동대문경찰서가 연행을 해가서 사흘만에 훈방이 됐지요. 당시 저는 '내가 구속이 되어야 이 문제가 크게 알려지고 나도 유명해진다'고 농반 진반으로 경찰에 그랬는데 죄를 엮으려고 해도 엮을 수가 없잖아요. 당시는 경찰들이 저를 잡아가기는 해도 다들 저더러 애국자라면서 은근히 저를 도와줬어요. 당시 서울공기가 너무 나쁜데 그걸 나쁘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 이야기를 계속 하니까 다 옳다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가택연금에 처해졌을 때도 대학강연을 가면 대학 앞에 저를 잡으려고 온 경찰차를 피해서 몰래 강연장으로 안내해주는 경찰이 있었어요. 그만큼 환경오염 문제를 심각하다고 제기하는 것은 이념을 떠나서 공감을 받았어요."
_공해반대에서 환경운동으로 바뀌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1988년 독일 녹색당 초청으로 독일에 가서 페트라 켈리 당수와 가까이 지내면서 환경이 남녀평등 평화운동까지 연결되어 있는 걸 깨달았지요. 일본에서 열리는 국제환경회의에 가서는 전 지구적으로 생각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지요. 그래서 90년에 지구의 날 행사를 하고 92년에 브라질 리우 환경회의가 열릴 때는 우리나라 대표단을 45명이나 모아서 갔어요. 리우에 갔더니 우리나라는 환경운동 하는 사람만 환경에 관심이 있는데 거기는 노동자 농민도 전부 환경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93년에 환경운동연합을 만든 게 그래서지요."
_환경운동을 하면서 시민들의 실천을 이끌어내는 비결이 있어요?
"저는 옳다고 생각하면 그걸 실천해요. 지금까지 자가용을 한번도 가진 적이 없어요. 지금은 달라졌지만 콜라도 안 마셨어요. 88년에 일본에서 열린 국제환경회에서 인도네시아 대표가 저더러 그래요. '너희 나라가 우리나라 나무를 두번째로 많이 자르는 나라다, 그런데 너희는 젓가락도 다 일회용으로 쓰고 버린다.' 그러더니 젓가락을 하나 사라고 그래요. 그 젓가락을 사서 계속 쓰고 다녔어요. 식당에서 그걸 꺼내서 먹으면 주변에서도 '너랑 밥을 먹으면 밥맛이 없다' 그러는데도 그랬어요. 그 후 일회용 젓가락 안쓰기 운동을 해서 지금은 식당에서 일회용이 사라졌잖아요. 일본의 환경운동가인 쓰지 신이치가 2005년에 한국에 왔는데 젓가락을 목걸이처럼 걸고 다니면서 써요. 제가 그랬어요. '일본의 환경운동은 멀었다. 당신 혼자만 실천하면 그건 환경운동이 아니다. 사회가 다 바뀌게 만들어야 그게 환경운동이다.' 쓰레기 종량제도 그래서 나온 거에요."
_30년 동안 하면서 가장 고마운 사람이라면.
"어린이들이요. 제가 책을 13권쯤 썼는데 이 중 10권이 애들 책이에요. 애들이 책을 읽으면 정말 실천을 해요. 그리고 그걸 다 저한테 편지를 써요. 수만통을 받았는데 거기에 일일이 답장을 하지 않은 것, 그게 제일 후회가 돼요. 나중에 대학생들 강연을 다니니까 학생들이 어렸을 때 보던 책을 찾아와서 사인을 받아가요. 제 책 읽고 환경 전공했다, 환경운동한다…걔들한테 답장을 했으면 얼마나 더 달라졌겠어요."
_정치는 안할 건가요?
"제가 9번쯤 정치 제안을 받았어요. 김영삼 대통령과는 직접 1시간반 동안 둘이만 앉아서 이야기도 들었고요. 그런데 그때도 딸이 부탁한 사인만 한 장 얻어서 나왔어요. 정치야 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고 정치는 5년마다 바뀌지만 환경은 영원하잖아요."
_횡령 혐의에 대한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요?
"대법원 판결은 나오지 않았어요. 제가 골드만환경상을 받은 상금 7만5,000달러도 기부한 사람인데 딸내미 유학자금 2,000만원을 환경운동연합에서 횡령했다는 게 말이 되나요. 책도 100만부나 팔렸고 식구도 셋인데 돈이 필요할 데가 어디 있다고. 지금 민간인 사찰도 그렇지만 제 문제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문제를 삼으려고 해서 제 주변 사람 100명을 조사해서 기소를 했어요. 그런데도 그 중에 저에 대해 나쁜 말이 하나도 나온 게 없어요."
서화숙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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