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였던 그림자/루이스 세풀베다 지음ㆍ엄지영 옮김/열린책들 발행ㆍ256쪽ㆍ9800원
칠레 산티아고의 오래된 공장에 초로의 남자들이 빗속을 뚫고 하나씩 찾아든다. 왕년의 사회주의 운동 동지들이었던 롤로, 루초, 카초. 1971년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민주정부인 아옌데 정부 치하에서 누린 짧은 정치적 자유를 뒤로 하고, 1973년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 군사정권의 탄압을 피해 국내외로 숨어들었던 옛 동지들이다.
왕년의 용사들을 한자리에 모은 이는 아옌데 정부 출범에 큰 역할을 했던 페드로. 칠레 최초의 은행털이범이었던 아나키스트 할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빼어난 지략과 행동력으로 우익들의 외화 반출 저지, 은행 무기점 탈취 등 음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그림자'라는 별명을 얻은 전설적 인물이다. 그는 군부가 권력을 찬탈한 절망적 상황에도 불굴의 투쟁 정신으로 롤로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다. "지금은 좌절과 패배의 거대한 파도가 우리를 덮치고 있어. 우리를 대신해 죽은 자들을 헤아려야 하는 기막힌 순간이란 말일세. 허나 언제까지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서야 할 때란 말일세."(188쪽)
그 전설의 '그림자'가 30년 만에 다시 만난 롤로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아옌데 집권 당시 우익 인사의 은밀한 부탁을 받고 모처에 몰래 숨겨둔 외화와 비자금 장부를 거두러 가자는 것. 롤로는 루초와 카초를 비밀리에 불러들이고 페드로를 기다리는데, 정작 그들의 아지트에 나타난 것은 떠벌이 코코. 롤로들과는 노선을 달리하던 왕년의 마오이스트는 자신의 출현에 뜨악해하는 그들 앞에 구식 권총 하나를 내놓는다. 권총의 주인은 다름 아닌 페드로. 할아버지의 유품으로 그가 평생 지녀온 그 무기가 코코의 손에 들어간 것은 코코의 집 앞에서 벌어진 불의의 사고 때문이다.
칠레 출신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63)가 2009년 발표한 소설이다. 그 자신 피노체트 독재 치하의 망명객이었던 그는 이 작품에서 늙고 세파에 찌든, 그러나 더 나은 세상을 꿈꾸던 젊은 날의 열정을 기억하고 있는 칠레 혁명세대들의 자화상을 애틋하고도 유쾌하게 형상화했다.
소설은 롤로, 루초, 카초, 코코(와 그의 아내 콘셉시온)의 대화를 통해 사회주의 정부를 일으켰다가 곧 스러졌던 그들의 청년 시절을 추억하는 데에 절반 이상을 할애한다. 물론 이 과거 여행에는 짙은 회한이 배어 있다. 오랜 망명 생활 끝에 돌아온 고국은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나라에서 머물고자 하는 헛된 노력, 아니 자기기만에 불과할 뿐"(49쪽)이라는 상실감을 주고, "멍청한 늙은이들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딸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나오는 카페"(211쪽) 같은 고도 자본주의의 산물들은 그들의 헌신을 빛바래게 한다.
하지만 회상의 중심에 페드로가 자리하면서 동지들의 얼굴엔 생기가 돈다. 모두 자유를 얻겠다고 투쟁할 때 "내가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점을 잊지 않기 위해서 투쟁"(159쪽)한다고 외쳤던 천생 혁명가. 군부 정권의 탄압을 뚫고 빵 운반 차량을 습격해 빈민에게 빵을 나눠주고 송전탑을 공략해 산티아고를 암흑천지로 만드는 놀이 같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낙관주의자.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네 사람이 달러 수거 작전을 펼친다. 잠든 혁명 정신을 깨우는 유쾌한 카니발이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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