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약이다,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가진 선배가 있었다. 진로 문제로 고심할 때도 연애 문제로 방심할 때도 심지어 큰 병이 의심된다는 의사의 소견서를 받아 들었을 때도 그는 그랬었다. 어차피 시간은 간다, 라고. 별다른 대안 없이 고작해야 시간 타령이 전부였음에도 이상하지, 왜 그렇게 많은 선후배들이 저마다의 고민거리로 그를 찾았던 걸까.
고해소도 아닌데 지금 와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그를 자기 고백의 수단으로 삼았던 게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그는 철통 보완을 자랑하는 단단한 입의 소유자였고 한번 술 마시기 시작하면 삼일 낮밤도 끄떡없는 튼튼한 위장의 소유자였으나 제아무리 무인도에 둘뿐이라 해도 사랑은 아니 할 유별난 외모의 소유자이기도 하였으니….
그 앞에서 나 무장해제 된 채 얼마나 자주 얼마나 헤프게 인생사 요약에 들어가곤 했던가. 그런 그에게도 치명적인 매력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손이었다. 그의 손은 큼지막한데다 보드랍고 한겨울에도 내내 벙어리장갑 속 같은 온도를 유지해서 잡고 잡히기에 아주 좋았더랬다.
휘청거리는 어떤 이의 중심이 되어주기도 하나 한편으로 안주하는 어떤 이의 안심을 흔들어놓기도 하는 손, 그 무시무시한 들킴에 대하여 요 며칠 깨달음이 많은 나였다. 민심 또한 이 손으로부터 비롯됨을 그제야 알게 된 까닭이다. 일찌감치 시간의 두려움을 알고 손의 위대함을 깨달았던 선배는 지금 농부로 산다.
김민정 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