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민간인 불법사찰의 몸통임을 자처하며 호통 기자회견을 했던 이영호씨의 청와대 직함은 고용노사비서관이었다. 명칭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이 자리는 청와대에서 일자리 창출과 노동관련 정책을 총괄하는 자리다. 왜 민정비서관이 아니라 노동비서관이 사찰에 개입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그가 특정 인맥의 고리였다는 사실로 풀린 셈이다. 그러나 필자의 더 큰 관심사항은 비밀사찰과 권력농단의 재미에 흠뻑 빠져있던 사찰의 몸통이 자기가 본래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했을까하는 점이다.
이씨는 직무상 사회정책수석의 지휘를 받아야 하지만 그동안 밝혀진 그의 행태로 보아 노동정책을 직접 쥐고 흔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MB정부가 한 번도 노동전문가를 사회정책수석에 앉히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이런 심증은 더욱 굳어진다. 특별한 공직경험이나 이 분야의 전문성도 없는 그가 어떻게 노동판을 쥐고 흔들 수 있었을까. 아마 정책이 아니라 인사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그가 주로 관심을 쏟고 힘자랑을 한 것도 인사문제였다. 2008년 4월 총선에서 비례대표 공천이 당연시되던 한국노총의 이용득 위원장을 물 먹이는 것을 시작으로 5월 들어선 고용노동부 산하 기관장의 물갈이가 본격화됐다. 대부분 군소리 없이 일괄 사표를 냈다. 나중에 밝혀진 대로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4년 임기의 절반만 채운 한국기술교육대 총장조차 물러나야 했고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은 3년 임기를 지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의 횡포는 비밀사찰팀을 꾸리던 그해 7월께 절정에 달했던 듯하다. 당시 새로 임명된 노사정위원장은 대통령의 위촉장을 받기도 전에 다른 사람도 아닌 노동비서관에게 사표를 미리 맡기는 험한 꼴을 당하기도 했다. 이는 대통령자문기구이자 노사관계 최고지도자들의 대화기구에 대한 청와대의 인식과 태도가 어땠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20년 넘게 어렵게 구축해놨던 노동관련 교육과 연구 인프라도 이들에게는 훼손과 해체의 대상일 뿐이었다. 90년 이후 유지되던 노동교육에 대한 정부의 투자는 2009년 초 노동교육원의 해체와 함께 축소 조정되어 아예 노동행정연수 중심으로 재편됐고, 88년 출범 이후 노동 분야 모든 종사자들의 자랑이었던 한국노동연구원은 언제라도 문을 닫을 수 있다는 협박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그동안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 후에도 상식에 어긋나는 인사는 고용부 내부와 산하기관장 선임 과정에서 반복됐으며 그 때마다 많은 인재들이 소리 없이 스러져갔다.
지난 4년간 노동 분야에서는 정변이 아니고는 경험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87년 이후 꾸준히 축적돼 왔던 이 분야 나름의 규범과 질서가 무너지고 신뢰가 허물어졌다. 척박한 토양에서 애써 가꿔왔던 커뮤니티가 낯선 침입자에 의해 유린되는 경우라고나 할까. 이영호씨가 낯선 침입자로 보이는 이유는 한 손으로 불법사찰서류를 뒤지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큰 이유는 민주화 이후 정착된 노동관련 여러 제도와 관행들을 다 무시하고 민주화 이전의 관치행정으로 돌아가려 했기 때문이다. 그가 주도하던 청와대 노동팀은 의견이 다른 집단과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고 타협하기 보다는 아예 외면하거나 탄압하려 들었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노동계나 학자는 관리의 대상이자 사찰의 대상일 뿐 정보를 공유하고 공감을 확대할 파트너가 아니었다.
이런 행태는 노사관계에서 잊혀져가던 공안의 추억을 되살려 놓았다. 노동행정은 행정의 관점으로만 보면 근로자보호행정이 본질이지만 군사독재와 유신시대를 거치며 노동문제가 점차 치안과 공안의 관점에서 다루어졌고 민감한 정치적 이슈로 변해갔다. 민주화 이후 노동행정이 애써 달성하려고 했던 목표는 노사갈등을 민주적 제도 속으로 수렴해 소화해 내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또 다시 노사관계를 관치와 공안으로 만져 보겠다는 시대착오를 경험한 것이다.
이에 더해 자유주의 경제원리를 앞장서 주장하던 일각의 학자들이 사찰의 몸통 주변에 몰려들어 정책을 자문하며 잠시나마 권력의 향기를 맡으려 했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최영기 경기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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