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삶과 문화] 생명의 아름다움은 없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삶과 문화] 생명의 아름다움은 없다

입력
2012.04.12 12:03
0 0

개표방송을 함께 보자고 아는 이 몇과 자리에 모였다. 출구조사 결과가 나올 즈음 서둘러 저녁을 먹기로 했다. 무얼 먹을지 설왕설래한 끝에 눈에 띄는 '옛날 식 왕 돈가스'집엘 들어갔다. 돈가스를 시켜 먹으며 다시 헨리에타 렉스라는 흑인 여성이 생각났다. '옛날 식 왕 돈가스'란 말을 듣고 있노라면 생명공학이 만들어낸 음식의 새로운 풍경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공학을 떠올릴 때마다 헨리에타란 인물을 외면하는 일 역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마침 그녀의 삶을 다룬 책이 세상에 나왔고, 생명공학의 추잡한 역사에서 가장 참담하고 또 가장 기이한 기억 속의 인물이 될 그녀의 생애 역시 세상의 관심을 얻게 되었다.

그녀는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종양 세포로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삶을 얻게 된 인간이 떠오른다. 생명공학의 발전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완전한' 죽음을 갖지 못하게 했다. 생명공학은 혈액, 골수, 세포 혹은 그 무엇으로든 우리는 분해된 생명의 한 조각을 보관하고 증식하거나 재생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호적이라는 유명한 제도 속에서는 죽음으로 기재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생명을 가질 수 있다. 생명공학은 '목숨'이라는 것과 '생명'이라는 것을 성공적으로 분리시킨다. 헨리에타 렉스 역시 그러하다. 자궁경부암으로 존스홉킨스 병원에서 목숨을 잃은 그녀는 종양세포로서 지금까지 살아있다. 그녀의 종양세포에서 배양된 세포는 2,000만톤이 되었고, 그렇게 배양된 세포를 이용해 생명공학은 많은 유전적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찾아냈다.

그런데 그녀를 상기하면 그녀가 자신의 죽을 즈음에는 없었을 우리 시대의 독특한 죽음 역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뇌사'라는 악명 높은 죽음의 형태가 그것이다. 이제 우리는 온전한 인격체 전체로서 죽을 수 없다. 생명공학은 다른 신체 부분들의 죽음으로 죽음을 전환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누구의 죽음이 아니라 '뇌'의 죽음이라는 희한한 죽음을 선물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세상에서 더 이상 살지 않는 사람이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생명으로 남아있게 됐고, 여전히 살아있지만 뇌의 죽음으로 인해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판정받게 됐다. 결국 삶의 대극이 죽음인 것이 아니라, 생명 속에 죽음이 혹은 거꾸로 죽음 속에 생명이 포함되어 있는 기괴한 세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생명과 죽음의 관계를 에워싼 생명공학의 변화는 염색체니 유전자니 하는 것으로 굳이 다가가지 않아도 일상생활 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농산업이 발전하며 쏟아져 나오는 많은 식품들은 이제 영양성분 표기를 하고 있다. 음식을 먹는 일은 어떤 영양 성분을 먹는 일로 대신 되는 셈이다. 그리고 유전공학 덕택에 이제 우리는 100년전에 먹던 그 빵의 맛을 만들어주던 밀알 하나로 그 시절의 빵 맛을 재현하는 유전자 조작 밀로 만든 빵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이런 새로운 유전자 디자인은 물론 음식을 소멸시킬 것이다. 음식은 이제 특정한 유전자의 구성과 조합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영양학적 지식이 식품의 산업적 생산을 가능하게 했듯이 유전공학은 우리의 식품을 특정한 유전적 잠재성을 소비하는 일로 만들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세계 없는 세계처럼 음식 없는 음식의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유전공학의 횡포로 전가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죽음이 제거된 생명의 세계로 채우려는 우리의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생명은 숭고하고 위대하다는 말이 으스스하게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을 제거한 세계, 얼마든지 유전적으로 완벽하게 재현된 옛날식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세계를 열어놓는다. 이런 지경이면 우리는 차라리 죽음을 허락 받은 세계에 살고 싶어질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생명의 아름다움이 우리 시대에 가장 반문해야 할 물음으로 떠오르는 순간이다.

서동진 계원예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