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등단한 젊은 소설가 중 비(非)서사적인 것에 집중하는 글쓰기로 한국문학의 경계를 넓혀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서준환 김태용 한유주 등). 명민한 일군의 작가들이 개척 중인 문학적 신세계 안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진경(珍景)을, 김유진(31)씨는 두 번째 단편집 <여름> (문학과지성사 발행)에서 오롯이 펼쳐 보인다. 여름>
다른 작가들과는 물론, 김씨 자신의 첫 단편집(<늑대의 문장> , 2009)과 비교해도 이채로운 이번 작품집에는 특별한 독법이 필요할 듯싶다. 표제작에 그 힌트가 있다. 김씨는 작은 수제(手製) 상자들을 캔버스에 이어 붙여 작품을 만드는 미술가의 육성을 빌려 이렇게 적는다. "수백 수천 개의 모서리가 만들어내는 질감, 경계가 희미한 형태들이 주는 모호한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감정을 가진 형태들을 풍경이라 부릅니다."(77쪽) 늑대의>
짧고 정갈한 문장을 구사하는 김씨는 특유의 회화적 묘사를 통해 이야기로 환원되지 않는 장면들을 포착해낸다. 표제작에서 Y는 동거인이자 공예가인 B의 작업장에서 집안으로 날아드는 먼지(톱밥, 시멘트 가루 등)를 강박적으로 닦아낸다. "면을 가진 모든 것들 위에, 먼지는 있었다. 먼지는 살아 있는 듯 끊임없이 태어나고 이동했다. 번식했다."(67쪽) 설거지 도중 수챗구멍에서 튀어나온 벌레에 공포심을 느낀 Y는 바닷벌레에 꼼짝없이 포위됐던 2년 전 B와의 여행을 떠올린다.
Y의 행동과 상념은 언뜻 맥락 없어 뵈다가 이내 하나의 '풍경'으로 되살아난다.(풍경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이 발견하는 것이라는 가라타니 고진의 유명한 명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풍경에 깃든 감정은 말할 나위 없이 B에 대한 Y의 감정이다. 권태인지 애증인지, Y 자신은 제 마음을 아는 것인지 판단을 내리기엔 모호한 풍경이다. 하지만 그 모호함 덕에 독자는 소설 속에서 마음껏 길을 잃을 수 있다.
풍경화는 본질적으로 내면의 시각적 전환이다. 이를 기억하고 김유진 소설을 읽으면 좋겠다. 빼어난 피아노 실력을 포기하고 아무 연고 없는 곳에서 동네 피아노학원 강사로 스스로를 유폐한 K의 고독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바다 아래서, Tenuto') 취직 턱을 내려 옛 애인을 불러낸 '나'가 참기 힘든 불편한 감정에 빠져드는 이유를 가늠해볼 수 있겠다.('물보라') 남자친구의 반대를 무시하고 떠나온 여행지에서 닳고 닳은 여행가이드와 신경전을 벌이는 '나'의 심리에 대해서도.('우기')
8편의 수록작 대부분은 1인칭 화자 '나'가 등장한다. 이들 작품은 그러므로 '나'의 내면이 투영된 풍경일 텐데, 이는 서정시의 본질이자 작법이기도 하다. 작품마다 강한 서정성이 느껴지는 이유다. 자연에 대한 원시적인 상상력과 그로테스크한 묘사로 주목 받았던 김씨의 첫 소설집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김씨는 "첫 소설집을 내고 장편을 준비하면서(지난해 첫 장편 <숨은 밤> 을 펴냈다) 작은 사실관계부터 잘 써나가는 기본기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면서 미묘한 관계나 감정을 파고드는 훈련을 했는데 그런 방식이 나에게 잘 맞았다"며 문학적 변모의 계기를 설명했다. 이어 "근본적으로는 삶의 경험이 쌓이면서 규정되지 않는 모호한 관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 작품이 변한 이유"라고 말했다. 숨은>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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