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공간에서 시인이자 소설가, 번역가로 왕성하게 활동한 월북작가 오원(梧園) 설정식(1912~1953ㆍ사진)의 작품을 한데 모은 <설정식 문학전집> (산처럼 발행)이 출간됐다. 그가 남긴 세 권의 시집 <종> (1947) <포도> (1948) <제신(諸神)의 분노> (1948)에 수록됐거나 해방 이전 발표된 시 60여 편, 장ㆍ단편소설 6편, 문학평론 4편이 1~3부를 이룬다. 4부에는 그가 번역한 셰익스피어 희곡 <하므??(햄릿)과 헤밍웨이 단편 '불패자', 토마스 만의 평론이, 5부에는 벽초 홍명희와의 대담과 시론 2편이 실렸다. < p>하므??(햄릿)과> 제신(諸神)의> 포도> 종> 설정식>
1912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난 설정식은 193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미국 마운트유니언대와 컬럼비아대에서 유학한 당대 엘리트였다. 해방 후 미 군정청 여론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좌익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입대해 월북, 휴전회담 때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그러나 1953년 남로당계 인사 숙청 과정에서 '미제 스파이'의 죄명을 쓰고 임화 등과 함께 처형되는 비운을 맞았다.
학창 시절 시, 희곡 공모전에 당선되는 등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였지만 설정식이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한 시기는 30대 중반이던 1946~1950년. 당시로서는 드물게 시와 소설 창작을 겸했던 그의 작품들이 이 4년 남짓한 기간에 쏟아져 나왔다. 자전적 내용이 주종을 이룬 소설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시는 당대 일급 시인이던 정지용 김기림 김광균의 호평을 얻었다. 특히 김기림은 설정식의 첫 시집 <종> 에 대해 "이색(異色)의 문(文)"이자 "새로운 장르를 우리 시에 더하였다"는 찬사를 보냈다. '자유는 그림자보다는 크드뇨/ 그것은 영원히 역사의 유실물이드뇨/ 한아름 공허여/ 아! 우리는 무엇을 어루만지느뇨// 그러나 무거이 드리운 인종(忍從)이어/ 동혈(洞穴)보다 깊은 네 의지 속에/ 민족의 감내를 살게 하라/ 그리고 모든 요란한 법을 거부하라'('종'에서) 종>
설정식의 조카사위인 문학평론가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발문에서 "독립 자주의 민족이념, 전 인민을 위한 자유로운 민주주의 그리고 그것의 실천을 위한 사상적 순수성을 다짐하는 수사의 강렬함"으로 그의 문학세계를 규정했다. 곽명숙 아주대 교수는 전집 해설에서 "설정식의 시는 <논어> <장자> 등 한문 고전들은 물론 동서양 우화 신화를 현학적으로 해박하게 펼쳐놓기도 한다"며 "이런 난해함과 관념성은 한국 서정시에 낯선 주지적 특질을 보여주며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고 평했다. 장자> 논어>
전집에는 휴전회담 당시 설정식을 만나 친교를 맺었던 헝가리 출신 언론인 티보 메러이(88)가 1962년 파리의 잡지에 기고했던 회상기도 실렸다. 이 글은 특히 숙청 당하기 직전 법정에 선 설정식의 마지막 모습을 증언하고 있어 귀중하다. "그의 고뇌에 찬 아름다운 얼굴은 심한 피로와 체념으로 차라리 무표정하였다. 재판정에는 조명이라고는 없었다. 오로지 눈빛만 반짝일 뿐이었다."(795쪽) 한국일보 문화부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자 설정식의 삼남인 희관(65)씨가 이번 전집을 엮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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