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대 국회의원을 뽑기 위해 우리는 오늘 투표소로 간다. 1948년의 제헌국회 의원들이 생존해 있다면 "벌써 19대야?"라며 감개무량해 할 것이 틀림없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경험도 실습도 해본 일이 없는 나라에서 최초의 근대민주주의 헌법을 만들고 한반도 최초의 '민주공화국' 정부조직법을 만드는 등 64년 전 그 제1대 국회가 수행해야 했던 토대 작업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이었을까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19대에 이르기까지의 선거의 역사도 파란만장하다. 고무신 선거, 관권선거, 부정선거 등 유무형의 파행과 불법과 탈법으로 얼룩진 선거사(史)를 우리는 갖고 있다. 그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그래도 우리가 19대 총선을 치르는 순간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대견하다면 대견한 일이다. '대견하다'고 말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금까지 열여덟 번의 국회의원 선거가 이 땅에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를 만들고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가 흘린 땀과 눈물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도 그 땀과 눈물의 연장선상에 있다. 민주주의는 단시일에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에 따르면 어느 날 아침 제비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해서 봄이 왔다고 말할 수 없듯 민주주의는 몇 번의 선거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일은 여전히, 아직도, 우리 사회의 과제이고 목표다. 오늘 투표소에서 내가 누구를 찍고 어느 정당을 지지할 것인가, 그 판단과 선택을 안내할 첫 번째 화살표는 민주주의라는 '목표의식'이다. 내가 선택하는 후보와 정당은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인물이고 단체인가? 링컨의 말을 빌면 그 후보와 그가 속한 정당은 '민주주의의 명제에 봉헌된' 후보이고 정당인가? 입으로만 민주주의를 떠드는 세력은 아닌가? 후보와 정당이 지금까지 어떻게 행동해왔는지 그들의 실행과 실천의 역사를 챙겨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후보 개개인이 가진 품성과 자질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후보가 좋은 품성과 자질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그 소유 자질이 반드시 실천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소유와 실천은 다르다. 그가 속한 정치세력과 정당이 그가 가진 자질의 발휘를 얼마든지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판단과 선택을 안내하는 두 번째 화살표는 후보와 정당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선거에 이기려고 하는가라는 문제, 곧 '목적의식'이다. 후보 개개인의 제1의 목표는 말할 것도 없이 선거에 '이기는' 일이다. "이겨야 한다"라는 것은 모든 후보에게 지상명령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후보에게 유권자는 물어보아야 한다. "당신은 왜 이기려고 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선거에 이기고 당선된다는 것은 모든 선거 캠프의 당면 목표다. 그러나 목표와 목적은 다르다. 이겨야 한다는 목표는 이겨야 하는 이유가 아니고 이기고자 하는 정치행동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이긴다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 되면 선거는 '무슨 수를 쓰서라도' 이겨야 한다는 비열한 술수전략의 희생물이 된다. 목적을 묻는 질문은 그래서 중요하다. 당신은 왜 이기려고 하는가? 물론 이런 질문이 던져지면 모든 후보, 모든 정당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총알같이 대답할 것이다. "국민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총선이건 대선이건 간에 '국민'을 내걸지 않은 후보와 정당이 없었다는 것, 그 '국민'은 종종 선거판의 허사(虛辭)이고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허다한 후보와 정치세력들이 국민을 위해서라는 말로 자기 이권과 이득을 챙기는 '그들만의 리그'를 벌여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유권자는 좀 엄정한 판단기준을 들이댈 필요가 있다. 이 때 아주 요긴하게 참조할 것이 2,3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놓은 '정치의 목적'론이다. 그에 따르면 정치의 목적은 공동체의 선, 곧 '공동선'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일이다. 나에게만, 혹은 내가 속한 집단이나 세력에만 좋은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좋은 것, 그것이 공동선이다. 내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도 좋은 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정치가 추구할 최고의 선이고 공동선의 핵심이다. 그것은 어떤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인 목적이며 정치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그 공동선, 즉 정의의 추구와 실현이다.
지금처럼 이권 확보와 기득권 유지가 정치행위의 목적이 되다시피 한 시대에는 전혀 맞지 않는 낡은 소리라고?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정치의 논리와 계산을 제 아무리 따지고 고려한다 해도 정치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문제는 우리가 선택과 판단의 잣대로 삼아야 할 소중한 가치다. 아리스토텔레스적 공동선을 요즘의 언어로 옮기면 그것은 '공존의 정의'다. "너도 살고 나도 산다"가 공존의 정의를 요약한다. 그 정의에는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공생의 윤리가 포함된다. 누구를 찍을 것인가? 공존의 정의를 추구할 줄 아는 후보와 정당, 공생의 윤리를 알고 실천할 세력은 누구인가? 4월 11일 아침 투표소로 가는 동안 내 마음을 지배하는 질문은 이런 것일 것이다.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