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을 세계평화의 적으로 묘사한 귄터 그라스(84)의 시가 거센 후폭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스라엘은 연일 그라스를 성토하고 있으나, 독일에서는 무작정 이스라엘 비판을 금기시해왔던 관행이 옳은지 차분히 따져보자는 합리적 자성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8일 그라스를 외교적 기피인물로 지정, 사실상 그의 입국을 금지시켰다. 엘리 이샤이 이스라엘 내무장관은 "그라스의 시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국민에 반하는 증오심을 부추기고 있다"며 "앞으로 그라스가 이스라엘을 방문하려는 시도를 막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과 독일 정치권은 그라스가 이스라엘과 이란을 같은 도덕적 잣대에 올려놓은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
그라스는 5일 발표한 '말해야만 하는 것'이란 시에서 "핵무기를 가진 이스라엘이 이란에 군사공격을 감행하려 하면서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있다"고 썼다. 유럽 석학들도 종종 이스라엘의 일방주의를 비판하지만, 독일 출신 작가가, 그것도 나치 친위대원(SS)으로 활동한 전력이 있는 그라스가 이스라엘과 이란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엄청난 모욕이라는 얘기다. 여기에 그라스의 시를 "역사적 책임감에 대한 아름다운 경고"라고 극찬한 이란 정부의 7일 논평도 이스라엘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샤이 장관은 "그라스가 SS시절 가졌던 반유대주의 사상을 옮기려 한다"고 했고, 귀도 베스터벨레 독일 외무장관도 "그런 비교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독일도 이제 유대인 학살에 대한 부채의식에서 벗어나 정책의 관점에서 그라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라스는 시에서 "반유대주의라는 보편화한 판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독일 네티즌은 일간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자이퉁에 "이스라엘의 호전적 정책을 비판하고서도 홀로코스트의 망령이라는 비판을 듣는 나라는 독일 밖에 없다"고 썼다.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의 칼럼니스트 톰 세게브 역시 "그라스의 시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스라엘이 정치적 관점에 따라 입국 유무를 결정하는 것은 이란이나 시리아가 하는 짓과 똑같다"고 비판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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