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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괜찮은 머슴 고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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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괜찮은 머슴 고르기

입력
2012.04.09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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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뒷벽에 그리 잘 썼다고 보기 어려운 글씨체로 '손님은 왕이다'라고 쓴 큰 액자를 걸어놓은 음식점에 들어갈 때가 있다. 손님 보라는 건지 종업원 보라는 건지, 아니면 주인 스스로 다짐하기 위해선지 알쏭달쏭하거니와, 사적인 경험의 범위 안에서는 그런 액자를 붙여놓은 집이라 해서 다른 집들보다 그다지 친절하지도 않았다. '손님은 왕'이라고 내세우는 집이나 '마돈나'(마시고 돈내고 나가라)처럼 다 먹었으면 빨리 돈이나 내고 나가라고 노골적 축객령을 써 붙이는 집이나 거기서 거기다. 고객들도 속으론 '손님은 왕? 돈이 왕이겠지'라 코웃음 치며 넘긴다. 구호로야 무슨 말을 못 하겠나? '손님은 왕'이 아니라 '손님은 신'이라 써 붙인들 뭐라 할 사람 없다. 혹시 농반 진반 시비조로 "신 대접이 겨우 이거요?"라 물으면 돌아올 대답은 뻔하다. "우리 집에서는 신을 이렇게 대접해요."

생각이나 취향이 독특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친절 봉사'보다는 '맛'이 훨씬 중요하다. 아예 '욕' 먹을 줄 알면서, 심지어는 '욕' 얻어먹기 위해 일부러 찾아가는 집도 있다. '왕 대접'이든 '비렁뱅이 대접'이든, 맛이 고만고만할 때 따지는 거지 그게 음식점의 본령은 아니다. 음식 맛이 없으면 아무리 친절해도 손님이 발길을 끊게 마련이고, 그런 음식점은 망한다. 어느 업종이든, 기본이 먼저고 태도는 다음이다.

선거철마다 국회의원 후보들이 내세우는 '국민의 머슴'이니 '충직한 지역일꾼'이니 하는 구호들을 볼라치면, 불친절한 식당 뒷벽에 뻔뻔스런 모습으로 걸려 있는 '손님은 왕'이라는 문구를 보는 느낌이 들곤 한다.

역시 사적인 경험의 범위 안에서는, 그들에게는 선거철 한 달만 국민이 왕이거나 주인이다. 아니, '표'가 왕이거나 주인이다. 일단 당선되면, 표를 던진 임자는 비렁뱅이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니 기꺼이 표를 주고 싶은 마음이 들 리가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표를 주느니 버리고 만다는 사람이 많을 땐 전체 유권자의 반이 넘는다.

그러나 그들이 나중에 아무리 주인 행세를 한다 해도, 민주주의 국가의 진정한 주권자는 국민이다. 비록 그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년에 한 번씩밖엔 오지 않지만. 머슴을 부리지 않고 모든 일을 직접 할 수 있다면 모르거니와, 그럴 수도 없으니 결국은 덜 나쁘고 덜 의심스러운 머슴을 고르는 수밖엔 없다. 이 경우에도 기준은 역시 기본이다. 겉보기에 싹싹하고 친절한지는 그저 참고사항으로만 삼는 게 좋다.

노비제가 공식 폐지된 뒤에도, 그 유제는 머슴이나 일본식 '하인(下人)' 제도로 꽤 오랫동안 남았다. 1910년대 중반,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조선인의 사치성 폐풍(弊風)의 하나로 '하인 두기'를 들고 몇 차례에 걸쳐 그 폐단을 지적했다. 그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한다. 첫째, 하인은 군식구다. 주인이 몸소 일 하면 될 걸 굳이 군식구를 두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둘째, 하인은 대개 먹는 것이 과할 뿐 아니라 주인의 물건을 아끼지 않는 습성이 있어 무엇이든 헤프게 쓴다. 셋째, 쌀이나 숯을 훔치거나 물건 사는 심부름하면서 주인 몰래 돈을 빼돌리는 게 다반사다. 넷째, 주인집 내정을 염탐해 두었다가 밖에 나가 나쁜 소문을 퍼뜨려 체면을 손상시키거나 심하면 큰 손해를 입히기도 한다.

그런데 총독부의 이 경고는 '하인' 일반이라기보다는 '나쁜 하인'에 대한 것이었다. 드물긴 했으나 주인과 한 가족처럼 사는 하인들도 없진 않았다. 주인이 운이 좋거나 안목이 있으면, 그런 하인을 고를 수 있었다. 국회의원 후보들이 너나없이 '머슴'을 자청하는 마당에, 저 시절의 '하인 고르는 법'을 적용하는 게 그리 비례(非禮)는 아닐 듯하다. 대의제 민주주의니 일단 '군식구' 줄이라는 권고는 무시하자. 나쁜 머슴은 먹는 게 과하고, 심부름하면서 주인 돈을 빼돌리며, 주인집 내정을 염탐하면서도 주인에게 숨기는 건 많다는 사실만 기억하자. 그러면 좋은 머슴은 몰라도 나쁜 머슴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머슴 되겠다는 사람이 신출내기라 이력을 알기 어렵다고? 그럴 땐 흔한 경구를 상기하자. '친구를 보면 그를 알 수 있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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