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가 따로 없다. 소통은커녕 남의 집 사람 보듯 대한 지 이미 오래. 한 집안에 살면서도 가족이라는 훈훈한 단어가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는다. 12일 나란히 개봉하는 할리우드영화 '비버'와 '이민자' 속 가족의 모습이다. 두 영화는 각기 다른 소재를 다루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하나다. 너무나도 등지고 싶지만, 결국 존재의 근거가 가족임을 그 구성원들이 깨닫게 되는 과정을 뜨거운 감성으로 전한다.
외면에도 끊어지지 않는 핏줄
'비버'는 남부러울 것 없는, 그러나 심각한 우울증에 빠진 한 남자를 중심에 둔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장난감 회사가 있고, 사랑스러운 두 아들과 아내가 있음에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멍한 눈동자로 하루 종일 누워있는 월터(멜 깁슨). 아내로부터 별거 통지를 받고 목숨까지 끊으려 했던 그는 비버 인형에게서 환청을 들으면서 삶의 전기를 맞는다.
'비버'가 미국 중산층의 정신적 공황을 다룬다면 '이민자'는 멕시코 출신 불법 이민 가정의 아픔을 그린다. 아내 없이 사춘기 아들 호세(루일스 갈린도)를 어렵게 키우는 카를로스(데미안 비쉬어)의 고난으로 화면을 채운다. 이탈리아의 고전영화 '자전거도둑'을 미국으로 옮겨 재해석했는데, 원작과 달리 희망 섞인 가슴 절절함을 관객들에게 안긴다.
두 영화는 빈부와는 무관하게 감정의 셔터를 내리 닫은 가족들의 모습으로 전반부를 채운다. 월터의 장남 포터(안톤 옐친)는 자신의 행동이나 외모에서 아버지와 닮은 점을 찾아내 하나하나 삶에서 지워가려 한다. 월터는 자신의 자아를 비버 인형에 투영하며 가족의 틈입을 막는다. 호세는 자신을 위해 삶을 저당 잡힌 아버지를 무시하기 급하고, 생계가 급한 카를로스도 호세의 일상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접점을 찾기 힘들었던 가족들은 가정에 비극이 닥친 뒤에야 새로운 관계의 분수령을 넘는다.
그래도 가족은 필요한 것인가
'비버'는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가족애를 넘어서는 인생의 교훈 한 자락을 남긴다. 술에 취한 월터가 보던 영화 속 대사는 '비버'의 부가적인 메시지를 함축한다. '과거에 연연하면 현재를 해치느니라… 한편 과거를 무시하면 미래를 해치지.' 가족 등 삶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바로 자신에게 충실할 때 행복은 가까이 있다는, 현대인을 향한 충고로 들린다.
배우들의 호연도 두 영화의 공통분모다. 멜 깁슨은 퀭한 눈빛으로 삶의 의미를 잃은 사내의 광기를 내비치며 건재를 과시한다. 메가폰을 들고 월터의 아내 메러디스 역까지 연기한 조디 포스터의 분투도 눈에 띈다. 한 사내의 유별난 가족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감정의 굴곡이 좀 평탄하다는 게 이 영화의 아킬레스건.
'이민자'의 데미안 비쉬어는 삶은 보잘것없으나 부성애로 가슴만은 뜨거운 아버지를 스크린에 새긴다. 영화 막바지 카를로스가 "왜 널 낳았냐고 그랬지…"라며 아들 호세에게 남기는 말은 오래도록 관객 가슴 속을 맴돌 만하다. '이민자'의 연출은 '어바웃 보이' 등을 만든 크리스 웨이츠 감독이 맡았다. 두 영화 모두 12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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