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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小史] <43>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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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小史] <43>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입력
2012.04.0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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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몸짓과 말투로 풍운아의 삶을 살았던 이미지와 달리 그의 죽음은 외롭고 허무했다.

1997년 프로야구 시즌이 개막한 지 며칠 뒤인 4월 10일 고혈압과 심근경색을 앓아 온 김동엽감독이 서울 용산구의 한 독신자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심장마비로 숨질 당시 그의 곁을 지켜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은 파란만장했던 59년의 생을 그렇게 홀로 마감한 것이다.

38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난 김동엽은 6ㆍ25때 월남해 부산 토성중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서울 경복고와 성균관대를 거쳐 조흥은행에 입단했지만 팀 해체로 현역생활을 청산하고 잠시 심판으로 변신했다. 69년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일본과 대만의 아시아선수권대회 2차 리그는 심판의 일방적인 오심으로 약세인 대만이 일본을 꺾는 이변이 벌어졌다. 어부지리로 한국이 우승했지만 다음날 신문의 헤드라인은'심판의 빗나간 애국심'이었다. 노골적인 편파 판정으로 사실상 승부를 조작했다는 비난의 주인공은 젊은 심판 김동엽이었다. 당시 김동엽은 한국의 우승을 위해 자신이 총대를 메겠다며 주심을 자원했다고 하니 야구계의 기인으로 불리며 숱한 일화를 만들었던 그다운 행동이었다. 여론의 비판 속에 심판에서 물러난 김동엽은 71년 건국대를 시작으로 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 공군을 거쳐 실업 팀 롯데와 한양대 감독을 맡으며 우승을 싹쓸이 할 즈음 '빨간 장갑의 마술사'라는 애칭이 따라붙었다. 경기 중 빨간 장갑을 끼고 유난히 요란스럽게 사인을 보내는 모습을 한 신문이 마술사로 표현하자 자연스레 별명으로 굳어진 것이다.

선수로서 빛을 보지 못했던 김동엽은 감독을 맡으며 특유의 코믹한 쇼맨십과 강한 리더십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혹독한 스파르타식 훈련은 선수들로부터 큰 반발을 샀고 직선적인 성격 탓에 구단 고위층과 의견 충돌도 다반사였다. 감독시절 모두 13번의 해임을 당했으니 오죽했으면 자서전 제목이 <그래, 짤라라 짤라!> 였을까.

82년 프로야구 원년에 해태 타이거즈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13경기만에 성적을 이유로 해임된 뒤 MBC청룡 감독으로 변해 숱한 입담과 화려한 제스처를 선보인 김동엽감독. 야구계 일선에서 물러난 후 라디오와 TV를 통해 명해설로 팬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던 그는 비록 쓸쓸히 떠나갔지만 빨간 장갑을 끼고 부렸던 수많은 마술들은 오롯이 그라운드에 남아있다.

손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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