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 소리] 1. 이신통을 찾아서 <6>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 소리] 1. 이신통을 찾아서 <6>

입력
2012.04.08 17:32
0 0

흥, 나두 못살겠으면 보따리 싸가지구 나올 거야.

조년 방정맞은 소리 봐라. 오 동지라는 이가 상처를 했다니까, 니가 안방마님이 되는 거여.

그날은 술손님을 받지 않고 건넌방에 선보는 자리를 마련해두었다. 나는 다홍치마에 연두색 저고리를 입고 얌전하게 안방에 앉아 있었다. 비장이 먼저 헛기침을 하며 들어섰고 엄마가 찬방에서 얼른 섬돌로 내려서며 반겼다.

어서 오셔요. 헌데 어찌 혼자 오셨습니까?

허어, 서둘기는…… 동지 어른 들어오시지요.

비장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들이 마루에 올라 건넌방에 들어가는 기척이 났다. 셋이 인사를 나누는지 두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장과 엄마의 활기찬 목소리 때문에 기다리던 손님이 분명히 오기는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찬모와 엄마가 치마를 끌며 마루와 건넌방을 왕래하는 소리가 들려서 이제 다담상이 차려지는가보다 했다. 이윽고 안방 문이 열리며 엄마가 나직하게 말했다.

가서 인사 올려야지.

나는 엄마의 뒤를 따라 건넌방으로 들어가 문가에서 잠깐 섰다가 살짝 상대를 보았다. 두루마기에 갓 쓴 차림새며 수염까지 기르고 있어서 술청에 오는 다른 손님들과 똑같아 보였다.

문안 올립니다.

나는 술상머리에서 하던 반절이 아니라 방바닥에 두 손과 머리를 조아리는 큰절을 했다. 오 동지도 앉은 채로 두 팔을 짚고 허리를 숙여 내 절을 맞았고 그와 마주앉았던 비장이 말했다.

술 한 잔 따라 드려야지.

내가 주전자를 드는데 동지가 잔을 들어 내밀었다. 술을 따르며 그를 보다가 눈이 마주쳐서 얼른 고개를 숙였지만 이제야 생김새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둥글고 살찐 모습이었으며 수염은 성글었다. 그는 내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빤히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여염 처녀가 아닌지라 능숙하게 상 위쪽으로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의 입은 헤벌어져 있었고 거의 웃는 얼굴이었다.

한 잔 쭈욱 드시고 얘한테도 주셔얍죠.

엄마가 호들갑을 떨며 빈 잔을 내게 쥐어 주었다. 동지는 주전자를 들어 술을 따르면서도 계속 내 얼굴만 바라보다가 술잔이 넘쳐흘렀다. 엄마가 얼른 수건을 들어 손을 닦아주고 교자상 위를 훔치면서 말했다.

애고, 잔을 보셔야지 딴 데를 보시면 어쩌나요?

이 사람아, 우리 동지 어른이 시방 잔을 보실 겨를이 있으시겠나.

엄마와 비장이 그렇게 주고받았다. 나는 자꾸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아예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저래 가지고 동지 자리는 어찌 받았나 몰라. 아무리 공명첩을 돈 주고 받았다한들 한눈에 보기에도 물려받은 가산을 돌보기는커녕, 한량으로 놀 줄도 모르는 촌놈이 분명했다. 이번에는 내가 비운 잔을 엄마가 들더니 동지에게 내밀었다.

제 잔도 받으셔얍죠.

아니다, 그래도 장모인데 사윗감께서 먼저 한 잔 쳐드려야지.

비장이 말했고 동지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엄마에게 술을 따랐다. 그가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자네 이름이 뭔고?

아리따울 연(娟)에 구슬 옥(玉), 연옥이라 합니다.

길게 끌 것이 뭐가 있겠나. 내일 당장이라도 나는 좋네만……

동지가 비장에게로 얼굴을 들이대며 말하자 엄마와 비장은 웃음을 터뜨렸다.

성미두 급하십니다요. 이제 세밑인데 설 쇠구 적어도 대보름은 지나야 혼사를 치를 수 있지요.

암 그렇지. 정월 스무날은 넘겨서 장가 드셔야지.

엄마가 내게 곁눈질로 물러가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인사를 올리고 얼른 안방으로 건너가버렸다. 그제야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와서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박고 혼자서 키들키들 웃었다. 혼사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 그가 우리 집에 와서 첫날밤을 지내고 내 머리를 올려준 다음에 내가 동지 댁으로 가면 되는 셈이었다. 나는 어린애처럼 그 사람이 싫다거나 시집가지 않겠다고 울고불고 하지는 않았으니, 어려서부터 엄마와 내 처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