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알리는 꽃은 여럿일 수 있다. 단순히 개화기로만 따져 산수유나 매화, 목련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고, 산과 들을 물들이는 흔한 진달래나 개나리에서 비로소 봄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도시 주변의 야산이 많이 사라져 무더기로 피는 진달래를 보기가 어려워졌다. 벚꽃이 피기 전에 그나마 와르르 한꺼번에 핀 모습을 볼 수 있는 게 개나리다. '나리 나리 개나리'라는 동요가 심어준 개나리와 병아리의 중첩된 색감, 한복 노랑저고리의 이미지도 정겹다.
■ 잇따른 개발과 도로 확장으로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 서울에도 개나리 명소가 적잖다. 양재대로 개포동 아파트단지, 수서 인터체인지, 흑석동 명수대 고개, 응봉동 개나리산 등이 우선 떠오른다. 가장 개화가 이른 곳은 수서 인터체인지 부근이다. 주말에 지나며 보았더니 벌써 노랑색이 한참 짙다. 한강 건너 응봉동 개나리산은 아직 반쯤만 노랗게 물든 걸 보니, 봄이 한강을 건너는 데만 하루 이틀은 더 걸리는 모양이다. 올해 유난히 늦어진 발걸음이다.
■ 올 봄의 꽃샘추위는 잠시 매섭게 찬바람을 몰아치다가 이내 봄기운에 밀려나는 예년과는 사뭇 달랐다. 그저 길기만 한 게 아니라 낮 시간에도 쌀쌀한 바람이 불고, 봄비인가 싶으면 진눈깨비가 내리는 등 심술까지 심했다. 태양의 남중 고도를 믿고 싹터 오른 쑥이 찬바람에 떠는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개화가 늦어지는 바람에 전국 각지의 꽃놀이 축제도 시들했다. 광양 매화축제나 구례 산수유 축제 등이 끝난 뒤에야 매화와 산수유가 만개했다.
■ 봄이 늦어진 진짜 이유는 알기 어렵다. 한랭한 대륙고기압이 오래도록 세력을 유지해서, 또는 온난한 태평양고기압의 발달이 늦어져서라는 기상청의 설명도 원인과는 거리가 멀다. 미리 예측할 수 있다면 축제 일정 조정 등 사전 대비라도 가능하지만, 이마저 어렵다. 하늘의 일을 짐작하는 사람의 능력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예년보다 늦긴 했지만 봄이 오긴 왔다. 지각을 때우려고 급히 달음질칠 봄이다. 서둘러 쫓지 않다간 일주일은 휙 도둑맞게 생겼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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