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이 완연했던 주말에 나는 마스크 쓴 채 온 집안 먼지 털어대는 총채질로 바빴다. 근교에 나가 오리구이라도 먹고 오자는 친구네 부부의 청을 마다하고 내가 집에 들어앉은 것은 봄맞이 대청소에 신이 나서가 아니었다.
남도를 뒤덮기 시작했다는 벚꽃만큼이나 희디흰 이로 웃기만 하면 좋으련만, 어두워지면 벌어지는 별별 사건 사고들이 오히려 대낮의 밝음을 생경스럽게 느끼게 한 탓이었다. 중국 동포에게 납치되어 끔찍하게 살해당한 한 여인.
7분 36초 동안 살려달라는 비명을 질렀음에도, 휴대전화 너머 현장 상황이 실시간으로 타전되고 있음에도, 사건 현장으로부터 불과 7분 거리의 파출소는 고요했던 바, 그 시간에 경찰들 뭐했냐고, 죄다 똥 싸러 갔냐고, 이게 대체 말이 되는 시추에이션이냐고. 이런 참극이 벌어질 때마다 격한 분노로 경찰청을 향해 삿대질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모자란 완력의 소유자인 내가 바로 여자이기 때문이다.
하굣길에 어디론가 끌려가 오랜 실종 끝에 처참한 시신으로 돌아왔던 한 친구를 기억한다. 그 사건의 범인이 잡히기까지 우린 야간자율학습으로부터 잠시 풀려나 해가 중천에 있을 때 집에 가는 횡재를 누렸었지. 일진 사납고 재수 없으면 내가 죽을 수도 있는 나라, 누가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고 노래 불렀나. 이런 일마다 왜 우리의 지휘책임은 위로 더 위로부터 묻는 게 아니라 아래로 더 아래로부터 추궁되고 마는 걸까.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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