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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우의 공감] 한국국적 취득한 연세대 국제진료센터소장 인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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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우의 공감] 한국국적 취득한 연세대 국제진료센터소장 인요한

입력
2012.04.06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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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요한 연세대 국제진료센터소장의 별명 중 압권은'보세품'이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made in usa'는 아니다.'made in korea'인데 어째 '노랑머리 한국인'이라 국산품이랑 현저히 차이가 난다. 따라서 제품에 하자가 있으니 보세구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한국에서 떠돌게 된 보세품이 된 것이다. 그는'껍데기'는 서양인이지만 뼛속 깊이 한국인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진외조부(아버지의 외할아버지)인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 선교사가 1800년대 말 한국에 정착한 이후 4대째 이곳에서 살고 있다. 그의 집안은 선교와 교육활동을 통해 한국 근대사에 큰 기여를 했다. 인 소장 역시 북한에 20여 차례 드나들며 결핵퇴치운동을 벌이는 등 조상들의 업적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은 연세대에서'의료 한류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덕분에 그는 최근 특별 귀화자로 선정되어 한국 국적을 받았다. 그는'이제 감방을 가도 한국 감방에 갈 수 있고, 4월11일 총선에서 투표할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에 유머감각이 뛰어난 인 소장을 만났다.

-인터뷰가 몰려 바쁜 모양이다.

이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그만할라고. 힘들어서.

-한국에서 태어났는데 국적은 늦게 받았다.

30년 전부터 귀화하려고 했다. 어머님이 진주만 폭격 세대니깐, 미국에 대한 애국심이 남다르다. 어머님이 원치를 않았다. 20년 전에는 한국 국적 없이 살기가 굉장히 불편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로는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살고, 비자내기 편하게 고쳐졌다. 작년 3월에 할아버지가 애족훈장을 받았다. 특사로 미국에 나가서 3ㆍ1운동을 많이 알렸고, 신사참배 반대하다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서 추방됐다. 국가 유공자 집안이 됐기 때문에 충분하겠다 싶어서 국적 신청을 했다. 내 공로보다는 가족을 잘 뒀기 때문에 국적을 얻은 것으로 생각한다. 선교사 선친들은 병원, 학교, 교회를 많이 세웠다. 난 1980년대 연세대 입학할 때 정원외 입학을 하는 특혜를 받았다. 91년 부서장으로 발령받았는데 그것도 특혜였다. 고마웠지만 짐이기도 했다. 이것을 어떻게 갚을 건가 고민했다. 한국 민족에 많은 은혜를 입었고 조상들은 많이 베풀었는데 나는 준 것보다 받은 게 많으니...

-한국형 앰뷸런스를 만들었다.

아버지가 84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적절한 응급조치를 받지 못하고 택시로 병원에 옮겨지던 중 숨졌다. 이 때문에 앰뷸런스를 한국형으로 개량해보자고 생각했다. 농촌의 좁은 길까지 들어올 수 있는 구급차가 있었다면 아버지가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앰뷸런스를 집 뒷 마당에서 만들었다. 93년도에 그 앰뷸런스를 순천에 기증을 하고 대량 생산에 들어갔다. 94년에 기업에서 와서 좀더 좋은 거 만들 생각이 없냐고 하길래,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을 돌아보고 95년 6월에 한국형 앰뷸런스를 만들었다. 이후 119를 포함해서 5,000대가 깔렸다.

-결핵퇴치운동도 한다.

형들 셋이 56년에 결핵을 알았다. 그 이후 집안에서 결핵퇴치사업을 했다. 그런데 북한에서 도와달라는 공문이 날아왔다. 그래서 97년도에 유진 벨 재단 회장인 형(스티브 린튼ㆍ한국명 인세반)하고 북한 결핵퇴치사업을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 때 지원을 많이 받았다. 6년 동안에 350억원 모금했다. 그걸로 형님은 미국에서, 나는 한국에서 했다. 그 일이 끝날 때쯤 내가 특혜를 받은 걸 조금 갚았구나 생각했다. 최근에는 의료의 한류화라고 작업을 하고 있는데 외국 환자 유치 1위를 했다. 여기 공간이 보시다시피 좁다. 이것도 가을까지 늘리고 리모델링한다. 이명박 대통령 만나서 의료 한류화를 해보겠다면서 이렇게 얘기 했다.'껍데기가 이렇게 생겼으니깐 제가 나서겠다'고 했더니 굉장히 좋아하시더라. 이번에 한국 국적을 받아 양쪽 국적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재주 있는 외국인들을 편하게 모실 수 있는 제도다. 내가 첫 단추를 끼웠다. 선물을 받았으니 앞으로 무엇으로 보답해야 될지 고민이다.

-좋은 일 많이 하면 되지 않겠나.

나도 50세가 넘었다. 91년 국제진료소 시작할 때는 환자가 이틀에 한 명 왔는데 지금은 하루에 100명씩 온다. 1년에 4만명이다. 외국 가기 위해 신체검사 받으러 오는 사람도 3만 資犬?된다. 그래서 연간 6만~7만명이다.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냥 은퇴하면 서울에 하루도 더 안 있을란다. 순천이 그립다. 아랫목 온돌방으로 돌아가고 싶다.

-온돌방 체질로 변했나 보다.

아, 미국도 옛날에는 키친 스토브(kitchen stove)가 있었다고 들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말씀을 들어보니깐 미국도 서부시대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사람들이 화로가 있는 부엌으로 다 모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 형제가 모인다. 그곳에서 수학 문제 풀다가 형한테 물어보고 하면서 인성교육이 일어났다. 1959년 내가 전라도에서 태어났는데 굉장히 가난했다. 군불이라는 거 아나. 나무해서 군불 땠다. 초가집 아랫목에 앉아서 놀고 자고 했다. 인터넷이 있어 텔레비가 있어. 온돌방 아랫목이 그립다. 나이 들고 힘드니깐 계속 순천 생각이 난다. 힘들면 편한데 가고 싶지 않나.

-순천에 집이 있나.

결핵요양소를 어머니(로이스 린튼ㆍ한국명 인애자)가 운영하신다. 얼마 전 내려가서 약이 잘 안 듣는 환자 30명을 보고 왔다. 우리 형들이 결핵을 셋 다 앓았다. 유진 벨 재단 회장인 형은 재발해서 30대 후반에 각혈도 하고, 죽다가 살아났다. 우리 집안에 결핵은 뭐랄까, 몸으로 실천한 병이다. 하하하. 그리고 순천 사람들 좋아한다. 얼마전 용산에 출마한 조순용(민주통합당 후보)에게 지원유세 갔다. 순천 형님뻘이다. 유세에 나가서'난 정치도 모르고 당도 모르는데 우리 순천 형님이 좋습니다'고 했더니 굉장히 좋아하더라. 여수에도 내려갔다. 새누리당 공천 받은 사람인데 여수에서 되기가 좀 힘들다. 또 손 한번 들어줬다. 김경진이도 무소속으로 광주 북구 갑에 나온다. 거기도 함 가야 돼. 그니깐 난 전국구다.

-진외조부가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미국 남부에 린튼가의 농장이 있었다. 켄터키 치킨 할아버지가 우리 농장을 샀을 정도로 좀 누리고 살았다. 연세대를 설립한 언더우드 선생이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다 해서 진외조부가 1895년도에 와서 전라도지역에서 포교를 했다. 복음 전파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교육이었다. 목포에서는 영흥, 정명학교 세웠고 1900년대 초 광주에서 숭일학교 수피아학교 등을 설립했다. 할아버지(윌리엄 린튼ㆍ한국명 인돈)는 전주신흥학교 교장, 기전여학교 교장을 지내며 신사 참배에 반대했고 마지막 업적으로 1956년 한남대를 세웠다. 특히 여성 교육을 강조했다. 진외조부가 쓴 100년 전 글을 보면 조선의 여자들은 공부 하지 않았다. 사랑방에서 글공부를 시작했는데, 출석을 잘 하지 않았다. 부모가 못 가게 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용돈도 줬다는 기록이 있다.

-'껍데기'가 다른데도 한국에 애착이 많이 가나.

솔직히 경상도는 배타적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라도 순천에서 나는 외국인이라는 생각을 안 하고 컸다. 참 따뜻했다. 동네아이들하고 굉장히 가깝게 지냈다. 순천은 순할 순(順) 하늘 천(天)으로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아주 순박한 곳이다. 순천에서 사랑을 많이 받았다. 내가 살던 매곡동은 꽃이 피는 동네, 매화, 매실이 나는 동네로 에덴 동산 같은 곳이다.

-미국에 대한 기억은.

4년에 한번씩 안식년에 미국을 가지만 기억은 아주 단조롭다. 미국 가면 굉장히 불편하다.'별장 살이'2~3일이면 외롭다. 한국 국적을 땄으니 감옥소를 가도 한국 감옥소 갈거다. 추방될 일이 없다. 국적이 없어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광주민주화운동 때 외신기자들을 위해 통역을 했다가 추방령이 떨어졌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미움을 사면 쫓겨날 수도 있겠구나. 항상 난 이방인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1997년도 북한에서 그렇게 열심히 뛰어 댕기면서 도왔더니 나보고 미 제국주의자라고 하고, 한국 들어오니깐 빨갱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여보소, 난 빨갱이도 아니고 우익도 아니고 좌익도 아니고 새누리당도 아니고 민주통합당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다. 나는 나다'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대부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꼴통 보수가 아니라 세련된 보수, 감정적인 진보가 아니고 이성적인 진보다. 대구에서 민주통합당 사람이 당선되고 광주에서 새누리당 사람이 당선되야 한다. 그걸 보고 죽는 게 내 소원이다.

-이번에 새누리당이 전라도에서 한두 석을 얻을 가능성도 있다.

어디에서, 광주에서? 까봐야 알아. 옛날에는 공화당에서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고 신민당 찍어 불거든. 그것이 우리 문화야. 반골기질. 한국은 시끄럽지만 겁나게 건강한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다. 한국이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한국 사람들은 몰라. 목욕탕도 있고, 새벽 1~2시에 돌아다녀도 누가 뒤에서 칼질 안 하지. 치안, 우리 경찰이 최고다. 우리 모두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미국은 어두우면 바깥에 못나간다. 그리고 대통령 심판하고 이런 거 그만해야 된다. 대통령이 좀 잘못을 했더라도 심하게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그렇게 따지면 링컨도 나쁜 사람이다. 신문사 300개를 통폐합 했다. 또 불법으로 메릴랜드주 의회를 봉쇄하고 대법원장 불러서 투옥 협박을 하는 등 불법을 많이 저질렀다. 그런데도 링컨은 예수 다음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어있다. 박정희 전대통령도 링컨에 비하면 주일학교 학생밖에 안된다.

-이번에 선거에 투표하나.

당연히 한다. 지역구는 서대문 갑인데 두 후보가 모두 연세대 동문들이다. 처음이라 감회가 깊다. 아침 일찍 가서 투표할 거다. 줄 서서 투표하는 것을 기다리는 나의 시간을 즐길거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나.

보쌈을 아주 좋아한다. 싸먹는 음식이 아주 맛있다. 돼지고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돼지고기랑 새우젓, 궁합이 잘 맞는다. 과학적으로도 새우젓이 단백질을 녹이는 효소 덩어리다. 위대한 음식이다. 전라도 백반, 광양 불고기, 쭈꾸미, 짱뚱어도 맛있다. 압력솥에서 기름을 뺀 오리전골에 부추를 넣고 들깨와 초장 찍어먹는 특이한 음식도 있다. 순천에서 묵은지 20kg을 가져왔다. 아마 식당에 묵은지를 싸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다. 회식때 부페식당에서 5kg 짜리 하나 풀었다.

-못 먹는 음식이 있나.

미역을 안 좋아한다. 깻잎도 별로다. 깻잎은 소도 안먹고 정주영 선생도 안먹는다. 그거 외에는 다 좋다. 우리 음식이 얼마나 먹을게 많나.

-별명이 많을 것 같다.

3개 있다. 안 좋은 별명이다. 얼굴마담, 국제시다바리, 보세품 등이다. 이건 쓰지 말고잉. 녹음에서 지워 주쇼. 외국인이 오면 늘 내가 나가서 심부름하니 국제시다바리, 얼굴마담 등의 별명이 붙었다. 학교 때 젤 웃긴 별명은 보세품이다. 어떤 놈이 날 보고 'made in usa' 라고 하니까 다른 놈이'made in usa는 아니야, made in korea인데 수출하다가 결함이 있어서 빠구 된 보세품이요'라고 했다. 보세품은 딱 맞는 말이다. 여기서 만들어졌으니 미제는 아니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뭔가.

소모전이다. 좌와 우,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대립이 너무 강하다. 한국 사람들끼리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비한다. 국회에도 타협 문화가 전혀 없다. 국회의원들이 너무 싸움을 많이 한다. 꼭 이겨야 하고, 머리를 밟고 넘어가야 한다. 그런 것 볼 때 너무 속상하다. 독재 정권 때는 법을 어기는 것이 미덕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쇠파이프, 화염병을 사용하는 것은 살인미수다. 공권력도 너무 무시당한다. 물론 과거의 죄 때문에 그렇지만 이제는 경찰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91년도 뉴욕 할렘에서 유학을 했는데 밤마다 총격전이 벌어지니 삼청교육대가 그립더라. 누가 와서 질서 좀 잡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룰을 안 지키면 개판 5분전이 된다.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은

한국인은 스스로의 업적을 너무 과소평가한다. 위대한 발전을 했는데도 자아비판을 너무 해버리면 위축이 되고 국가가 힘을 발휘 못한다. 교만할 것 까지는 없지만 프라이드를 가지고 우리가 가진 자유와 물질적인 성공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 또'젊은 사람들이 싸가지 없다'고 하지만 우리 세대가 그렇게 키웠다. 반드시 변해야 하는 것은 교육이다. 작년에 터키를 갔을 때 콜라를 샀는데 주인 아줌마가 돈 계산을 빨리 안 하길래 안에 들어가서 봤더니 한국 사극을 보고 있었다. 한류가 대단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인들이 자신의 업적을 너무 과소평가 하지 않았으면 쓰겄다, 이 말이제.

● 인요한은 누구

1959년 전주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자랐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했다. 그의 집안은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진외조부(아버지의 외할아버지)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 시절부터 한국에서 의료 및 선교사업을 하며 뿌리내렸다. 인소장의 할아버지인 윌리엄 린튼(인돈)은 22세 때 한국에 와서 48년간 의료, 교육 선교 활동을 했다. 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 거부 등 항일운동을 주도했고, 한남대를 설립했다. 인 소장의 아버지 휴 린튼(인휴)은 군산에서 태어나 전남 도서지역에 600여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인 소장의 형인 스티브 린튼(인세반)은 '유진벨' 재단의 회장이다. 저서로는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이 있다.

조재우 선임기자 josus62@hk.co.kr

조영호기자 you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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