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에게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줬다. 나눠 먹으라고 했더니 서로 그릇을 움켜쥐고 으르렁거린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머니가 나눠 주는 건 최선이 아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이게 마련이니까 다툼이 계속되거나 최소한 아이들이 불만을 거두지는 못할 게다. 이럴 때, 논리 같은 건 전혀 모르고 말귀만 트인 아이라도 완전히 설복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아주 간단하다. 어머니가 한 아이에게 말한다. "형인 네가 짜장면을 둘로 나누렴." 그리고 다른 아이에게 말한다. "형이 나눠놓으면 동생인 네가 먼저 고르렴." 형은 기를 쓰고 똑같이 절반으로 나눌 것이고 동생은 나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형은 먼저 나눌 권리를 가졌으니 불만을 제기할 수 없고 동생은 형이 어떻게 나눠도 자기가 고를 권리를 가졌으니 당연히 불만이 없다.
이것은 근대 민주주의의 기반인 삼권분립을 말해준다. 규칙을 제정하는 어머니는 입법부에 해당한다. 규칙을 실행하는 형은 행정부이고, 규칙의 실행을 심판하는 동생은 사법부다. 각각 권리를 나누어 가졌으므로 정립(鼎立)의 균형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게 있다. 삼권분립이라면 보통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권력이 대등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권력의 수평적 측면에서 보면 대등하며, 또 그래야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하지만 권력의 기원과 원천을 살펴보면 삼권은 결코 대등한 게 아니다.
앞의 사례에서 아이들이 짜장면을 민주적으로 나눠 먹는 과정이 가능한 이유는 어머니가 규칙을 정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권력의 근본이 입법부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모든 것은 법을 제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삼권은 권력의 크기와 영역에서는 대등하지만 근원과 기원에서는 입법부가 앞선다. 사실 삼권분립의 원칙 자체를 확립한 게 바로 입법부다.
서구와 같은 시민혁명을 겪지 않고 오랜 왕조 시대를 거쳐 곧바로 민주주의 제도가 이식된 우리 사회에는 흔히 입법부보다 행정부를 권력의 원천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만이 아니라 왕조 시대의 경험이 길었던 사회들은 예외 없이 행정부가 지나치게 강력한 현상을 보인다(행정부의 원형은 왕조 시대에도 있지만 입법부는 없다). 정치인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도 그렇게 여긴다.
하지만 행정부가 행사하는 권력은 사실 입법부가 위임한 것이다. 입법부는 국민에게서 권력을 위임 받기 때문에 당연히 최고 권력기구다. 그런데 근대 국가의 초기에는 사회가 복잡하지 않았던 탓에 법을 상시적으로 제정할 필요가 없었고 의회가 상설 기구로 존재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최고 권력기구가 상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문제가 많다. 그래서 의회가 소집되지 않는 공백기에 의회의 권력이 위임되어 상설 기구로서 행정부가 성립한 것이다.
그렇다면 권력의 스펙트럼은 명확하다. 국민의 권력이 위임된 것이 입법부의 권력이며, 입법부의 공백기에 그 권력이 위임된 것이 행정부의 권력이다. 그 점은 민주주의가 외부로부터 이식된 우리 현대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될 때도 분명히 의회가 먼저 구성되었고(5월) 이 제헌의회에서 정부조직법이 제정되어(7월) 정부와 대통령이 생겨난 것이다(8월). 사실 그런 순서는 당연하다. 의회가 법을 제정하지 않는다면 정부기구를 어떻게 할지, 대통령을 뽑을지 말지, 임기는 몇 년으로 할지를 정할 수도 없으니까.(그런데도 48년을 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로 여기는 것은 아이러니다)
오늘날 의회가 정부의 권력 행사에 문제를 제기하면 정부에서 흔히 간섭이나 월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데,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을 모른다는 점을 보여준다. 입법부는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 받은 최고 권력기구이므로 정부의 모든 활동에 당연히 간섭할 권한이 있다.
올해 우리 사회에서 치러질 총선과 대선을 놓고 여론은 총선을 대선의 전초전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 동안 의회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행정부의 시녀 역할을 자임해온 탓이 크지만, 그래도 민주주의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의회에 있다. 총선은 대선의 전초전이나 예선전이 아니라 민주주의 선거의 메인이벤트다.
남경태 인문학 저술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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