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갈까요/김서령 지음/현대문학 발행·312쪽·1만3,000원/
이별 주제로 9개 단편 실어
소설가 김서령(38)씨의 두 번째 단편집이다. 수록작 9편의 주인공들은 다들 가까운 사람과 이별했거나 이별에 직면해 있다. 책 첫머리에 배치된 작품 '이별의 과정'은 아예 "그러니까 이건, 이별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라는 문장으로, 열여덟 때부터 사귀어온 남자친구와 서른 목전에서 갈라섰던 실연담의 운을 뗀다. 각양각색의 이유로 벌어지는 별리(別離)의 사연들은 저마다 서사의 힘을 발휘하며 독자를 휘어잡는다.
하지만 작가 김씨의 관심사가 흥미롭고 자극적인 이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에 있는 것 같진 않다. 그보다는 무지근한 상처를 입고 휘청대던 이들이 겨우겨우 제 마음을, 제 삶을 가누어 가는 내면의 여정에 눈길을 준다. 거의 모든 수록작의 화자(이별의 당사자이거나 관찰자)가 '나'인 까닭도 이와 무관치 않겠다.
표제작의 '나'는 거액의 빚만 남기고 자살한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자마자 유럽으로 도망치듯 떠난다. 11년 간 다니던 회사까지 관두고 죽은 남편의 지갑에서 나온 현금 200만 원만 지닌 채로. 뱃속에는 9주 된 아기까지 있다. 로마의 민박집에서 그녀는 오래 전 한국을 떠나온 주인 남자를 만나 위로를 받지만 결국 그의 구애를 물리치고 길을 나선다. "그가 돌아서고 나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외로워질 것이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해 그의 손을 조금 더 오래 잡고 있었다."(68쪽)
미스터리 기법이 가미된 '오프더레코드'는 사라진 동료를 짝사랑하던 여기자와 그의 소설가 아내의 이야기. 입사 동기인 신원의 실종에 상심한 '나'는 마침 불거진 그의 아내 지영의 표절 혐의를 대서특필한다. 자신의 사랑을 가로채고 사라지게 만든 장본인을 향한 악에 받친 공격이었다. 5년이 흐른 뒤 '나'는 인터뷰를 명목으로 다시 지영을 찾아간다. 지영은 항의한다. "왜 내 이야기를 자꾸 잊은 척하는 거예요? 아니면, 정말 잊은 거예요?" "소설을 베낀 건 내가 아니라고, (중략) 내가 수십 번 얘기했잖아요."(217~8쪽) 물론 '나'도 이미 알고 있다. 다만 그 사실을 인정할 만큼 사랑의 미련을 떨치지 못했을 뿐. 상실의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이 지난한 것은 전 남편이 저지른 외도의 증거물을 여태 간직하고 있는 '나'의 두 번째 여자친구('애플민트 셔벗 케이크')나, 아들이 고추장 통을 건지려다가 바다에서 익사한 뒤 음식에 고춧가루를 숫제 쓰지 않는 어머니('거짓말')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상처를 서둘러 봉합했다가는 덧나고 만다. '돌아본다면,'의 주인공 은주에겐 대학 시절 함께 간 엠티에서 화재로 숨진 남자친구 준영이 있다. 방송작가가 된 그녀는 그와의 비극적 연애담을 소재로 쓴 드라마로 꽤 이름을 알리지만, 사실 두 사람은 고작 몇 달 사귀며 키스조차 안 해 본 사이다. 드래그레이싱(단거리 자동차 경주) 마니아인 애인을 좇아 대학 시절을 보낸 지방 도시에 들른 그녀는 새삼 그 불편한 기억과 마주한다. 자신에게 있어 준영은 "제대로 알았던 적 없으므로 제대로 잊을 수도 없는"(166쪽) 사람임을 깨닫는다.
작가는 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별이란 "한 시절에게 안녕을 고하고, 또 다른 시절과 맞닥뜨리는 과정"(9쪽)이라고 말한다. 안쓰럽고 때론 가슴 먹먹한 이 소설집의 이야기들은 그러므로 행복과 비탄이 갈마드는 우리들 인생에 대한 따뜻한 위로이기도 하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