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국 사신들에게 가장 큰 선물은 두 장의 탁본이었다. 중국 명필 왕희지의 집자로 일연의 연대기를 쓴 인각사비(경북 군위군)와 한국 서예의 시조인 김생의 집자로 쓴 태자사비. 빼어난 글씨로 추앙 받았지만 그로 인해 탁본 노역에 지친 민초들에 의해 손상되는 운명을 겪기도 했다. 그 중 가로로 두 동강 난 자국이 뚜렷한 태자사비 탁본이 '도를 듣다, 聞道(문도)_ 김생과 권창륜 박대성, 1,300년의 대화'전에 걸렸다
왕희지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를 뛰어넘는 경지로 성인 반열에 오른 김생. 그의 탄생 1,300주년을 기념해 처음으로 그의 작품 세계가 조명됐다. 지난달까지 열린 '필신筆神_ 김생에서 추사까지'전에 이은 전시로, 29일까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다. 김생의 글씨가 현대 필묵문화에 미친 영향도 보여준다. 서예와 서화에서 각각 현재 최고로 꼽히는 초정 권창륜(69), 소산 박대성(67)의 작품 50여점이 중심이다.
13년 전부터 경주로 거처를 옮겨 서화 작업을 이어가는 박 화백은 김생의 혼이 서린 경북 봉화군의 청량산을 그린 여러 점의 대작을 선보였다. 원효가 도를 통하고, 퇴계 이황의 앞마당이었던 청량산에서 김생은 수도하며 글씨에 몰두했다. 그가 기거한 김생굴과 쉼없이 쓴 글씨로 먹물이 스몄다 해 '묵강(墨江)'과 '필봉(筆峰)'으로 불리는 청량산의 봉우리도 화폭에 담겼다. 모필처럼 그려낸 박 화백의 '필봉'은 세로 6m에 이르는 대작이다.
다보탑, 석가탑 그림과 함께 구륵법(여백을 메워가며 글씨의 윤곽을 만드는 서화 기법)으로 김생의 태자사비를 옮겨 쓴 박 화백의 '화엄 불국'엔 특히 눈길이 오래 머문다. 3년간 수도하듯 써냈다는 글씨 앞에선 숙연한 마음마저 든다.
서예가 권창륭씨는 김생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다. 권씨는 "왕희지의 글씨가 잘생긴 귀공자라면 김생은 도를 통한 도인이요, 왕희지가 움직임 없는 조각이라면 김생은 엎드리기도 하고 돌아보기도 하고 눈물도 흘리는 자태가 돋보이는 글씨"라고 평했다. 그는 김생의 필체가 더 발전했더라면 이와 같을 거라며 '퇴계 이황 습서시'를 행서와 초서가 뒤섞인 광필에 가깝게 써냈다. '퇴계 이황 습서시'는 조맹부의 자유분방한 글씨체를 비판한 내용으로, 글씨체와 시의 대비가 흥미롭다. (02)580-1300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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