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들의 전봇대 싸움, 맨홀 싸움이 점점 더 꼬여가고 있다. 이른바 '필수설비'다툼이다.
필수설비란 통신사들이 선을 설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신주와 지하관로(파이프)를 말한다. 예컨대 초고속인터넷이나 전화선을 가정마다 설치하려면 ▦지상은 전신주를 통해 ▦지하는 맨홀 밑 관로를 통해 케이블을 연결해야 한다. 요즘은 지방자치단체에서 미관 문제 때문에 전신주 설립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필수설비 중에서도 지하관로가 가장 중요하다.
문제는 전봇대와 지하관로가 KT 소유라는 점. 예전 국영기업 시절 전화사업을 독점할 때부터 KT가 설치한 자산이다. 하지만 유선통신시장에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등이 뛰어들어 경쟁체제로 전환되면서 이들 업체는 지하관로 등이 필요하게 됐고 KT에 '돈을 낼 테니 같이 쓰자'고 요청했지만 KT는 '여유가 없다'고 꺼리고 있다. '함께 쓰자' '안 된다'는 논쟁은 수년째 계속되고 있는데 최근 방송통신위원회 수장이 바뀌면서 상황은 점점 더 꼬여가고 있는 것이다.
4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KT는 사실상 추가적인 관로 개방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담은 의견서를 지난주 방통위에 제출했다.
애초 방통위는 중복투자 방지를 위해 KT가 필수설비를 타 통신사에 제공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이를 KT와 KTF가 합병할 때 인가조건으로 부여했다. 하지만 KT가 이를 이행하지 않고 타 통신사들이 이런 KT를 제재하라고 항의하자, 방통위는 "KT가 필요할 때 추가로 케이블을 매설할 수 있도록 케이블 직경의 135%를 관로 내 여유공간(예비율)으로 남겨두고 나머지 공간을 타사에 빌려주라"고 요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KT는 의견서에서 "예비율이 150%는 돼야 한다"면서 실제 여유가 있는 지 시험해보자고 역 제의를 했다.
방통위는 시험방식에 대해서도 KT 관로 10군데를 골라서 예비율만큼 공간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케이블로 꽉 채운 뒤 유사시 대체 케이블을 넣을 수 있는 지 윤활제를 발라 케이블을 밀어 넣는 식으로 테스트해 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KT는 의견서에서 ▦시험 관로를 100군데로 늘리고 ▦환경오염이 우려되는 윤활제는 사용하지 말며 ▦시험도중 케이블이 손상되면 손해배상을 하고 ▦정보통신공사협회가 시험 작업을 해야 하며 ▦SK와 LG 등 경쟁업체들도 공평하게 관로를 개방하라고 요구했다.
방통위 실무진들은 KT의 제안서를 받고 발끈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는 "한정된 시간에 100군데를 시험하는 것도 문제이고, KT도 지금까지 사용한 윤활제를 문제 삼는 것, KT 공사를 수주한 업체들이 70% 이상이어서 객관적이지 못한 정보통신공사협회가 시험을 하겠다는 것 등 모든 주장에 문제가 있다.한 마디로 필수설비는 못 내주겠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KT도 할 말은 있다. KT는 더 이상 국영기업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전봇대와 지하 관로도 더 이상 국가자산이 아닌 기업 사유자산인데, 경쟁사들에게 무작정 빌려주라는 건 있을 수 없는 발상이란 주장이다.
KT의 강한 반대에 부딪친 방통위는 당초 지난달 22일로 예정된 내부심사일정을 미룬 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달 중에 관로 시험을 강행할 계획이지만, 결과에 승복할 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업계에선 "방통위가 KT에 너무 끌려 다닌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전임 최시중 위원장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KT 사장 출신의 이계철 위원장이 부임하면서 방통위가 KT에 대해 더욱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다 보니 "KCC(방통위 영문 표기) 위에 KT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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