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이 왔네?"
3일 오후 6시 서울 강동경찰서 여성청소년계 사무실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언니'를 보러 온 이은진(가명ㆍ17ㆍ서울 Y여고 2) 양이다. 학교폭력 피해자인 이 양은 강동서에서 멘토로 연결시켜준 신은숙(32) 경장을 언니라고 부른다.
"언니, 선물이에요."
얼굴에 한 가득 웃음을 머금은 이 양이 신 경장에게 화장품이 든 봉투를 건넸다. 신 경장은 "뭘 이런 걸 다 사왔니"라며 타박하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을 하자 김상순(48) 경위가 "이거 언니만 챙기고 아빠 것은 없느냐"며 볼멘소리를 한다. 이 양이 "아빠 것은 다음에 사면 되잖아요"라며 화난 시늉을 해 보이자 사무실에 웃음꽃이 피었다.
이날 이 양의 모습은 여느 또래 여고생들과 다르지 않았다. 싱거운 농담에도 웃음을 참지 못했고 장난도 곧잘 걸어왔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이 양이 이렇게 밝은 모습을 하리라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학교폭력의 충격으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지난해 경기 하남시 A고교에 다니던 이 양은 일명 '왕따'를 경험했다. 학교에서 소위 잘 나가는 아이들에게 밉보인 후부터 터놓고 얘기할 친구도 없었다. 공개적으로 욕을 듣고 망신을 당한 일도 있었다. 담임 교사에게 하소연도 해봤지만 그 때뿐이었다. 이혼 후 힘든 생활을 하는 아버지도, 부모 대신 이 양과 동생 둘을 키우고 있는 할머니도 이 양의 고민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지난해 10월 코뼈가 내려앉을 만큼 맞았다. 방과 후 집으로 가던 이 양을 같은 학년 남학생과 여학생이 학교 인근 골목으로 끌고가 "너가 안 좋은 소문을 내고 다닌다고 들었다"며 멱살을 잡아 흔들어 위협하고는 주먹세례를 퍼부었다. 코뼈가 부러지고 얼굴 곳곳에 피멍이 들었다. 턱이 부어 식사를 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정말 지옥 같았어요. 다쳐서 아픈 것보다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 그리고 모멸감이 더 컸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이 양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매일 악몽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 양은 "자다가 소리를 지르고 베개를 던지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기말고사 기간 중이던 지난해 말 결국 전학을 택했다. 하지만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 양은 "친구 사귀는 게 두려웠고 학교폭력을 당했던 사실이 알려지는 것도 싫었다"고 말했다.
이 양이 다시 웃음을 찾은 것은 지난 2월 강동서를 찾으면서부터다. 피해 신고를 받은 강동서 여청계 직원들은 이 양이 극심한 우울증 상태임을 알고 협약을 맺은 강동경희대병원에 데려가 정신과 치료를 받도록 했다. 그리고 신 경장이 이 양의 멘토를 자처했다. 이 양과 카카오톡 친구가 된 신 경장은 수시로 이 양과 연락하며 안부를 묻고 방과 후에는 함께 밥을 먹기도 했다.
이 양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처음엔 말에 대꾸도 안 했지만 점차 말수도 많아지고 표정도 밝아졌다. 공부를 하겠다는 의욕도 생겨 강동서와 협약을 맺은 보습학원에서 수학 강의도 듣고 있다. 신 경장은 "은진이가 웃는 걸 처음 본 날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아픔을 잘 극복하고 있어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이 양은 "내 옆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모든 걸 포기하려 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경찰 언니, 아빠도 있어 든든하다"며 "앞으로 조리 관련 학과에 진학한 후 일류 조리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박철현기자 k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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