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붐을 타고 해외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서울에 호텔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지금 호텔 수로는 관광객의 60% 정도밖에 수용할 수 없다며 한 달에 1건 꼴로 호텔 신축 허가가 난다. 이 정도는 아니지만 개항 이후 이권을 노리고 서구 열강들이 한반도에 몰려올 때도 호텔 부족을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와 헐버트가 발행한 월간지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 1896년 7월호의 부동산 임대광고에는 '서울은 소규모 호텔도 몹시 필요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주한미국공사를 지낸 호레이스 알렌의 <조선견문기> 에도 '철도가 놓이기 전의 초창기에는 서울에 적합한 호텔이 없었으므로, 탐방객들은 대개 어떤 종류의 소개장을 가져와서 자기네 나라의 공사관에서 접대를 받곤 했다'는 글을 볼 수 있다. 조선견문기> 더>
1902년 건립돼 국내외 정치인들의 회합 장소나 외국인들의 숙소로 애용돼 유명해진 호텔이 프랑스계 독일인 앙트와네트 손탁(1854~1925)이 짓고 운영한 '손탁호텔'이다. 하지만 서울에 생긴 첫 서양식 호텔은 이탈리아인 삐이노가 1897년 4월 정동에 문을 '서울호텔'이었다.
"근대개화기 서울의 서양인 호텔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역사현장이었던 순간들이 수두룩했다." 당시 정동과 서대문 일대 서양식 호텔의 역사를 간추려 묶은 <손탁호텔> (하늘재 발행)을 낸 역사연구가 이순우(50)씨는 4일 손탁호텔 자리이던 정동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앞에서 "이들 서양인 호텔을 단순히 커피나 사교문화와 같은 근대 서양문물이 퍼져 나가는 진원지로만 이해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손탁호텔>
책에서 이씨는 서울보다 먼저 생긴 인천의 호텔들, 1900년대 초반 10년 간 성업했던 서양 호텔들을 폐업으로 몰아 간 일본의 철도호텔 등을 비롯해 커피의 전래, 당구장 도입, 신식결혼식의 기원, 처음 자전거가 등장하던 풍경 등 그 시기 풍물 이모저모를 신문 기사와 서적 등을 꼼꼼하게 인용해가며 설명한다. 청일전쟁 이후 친일파 내각에 맞서 규합된 친미친러파 정치세력인 '정동구락부' 회합이 손탁호텔에서 자주 열렸다는 주장은 근거가 불확실하다고 지적하는 등 통념들을 자료로 고증하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그는 '근대서울의 역사문화공간'이라는 주제로 꾸준히 책을 내고 있다. 정동에 생겼다가 그대로 남거나 옮겨간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중국 공(영)사관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정동과 각국 공사관> 을 올해 초 냈다. 대한제국 말기사 연구는 드물지 않지만 그처럼 외국공관 같은 특정 소재를 자료 중심으로 엮어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광화문 광장의 옛 터 표식은 절반 정도가 위치가 잘못됐다"고 말하는 이씨는 곧 광화문대로 주변 건물의 역사를 담은 <광화문 육조길> 을 내고 종로의 풍물과 관련된 책도 쓸 계획이다. 광화문> 정동과>
독학으로 역사를 공부한 그가 저술 다음으로 공을 들이는 것은 답사 가이드.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같은 저서를 통해 소개한 남산의 일제강점 현장이나 정동이 주요 코스다. 봄ㆍ가을 다니기 좋은 철에는 1, 2주에 한 차례 정도 답사에 나서는데, 교사나 근대사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들이 평균 30명 정도 참여한다. 통감관저,>
"정동 답사는 보통 원구단 이야기를 곁들여 덕수궁 대한문에서 출발해 중추원이 있었고 조선사편수회에서 썼던 서울시청 별관, 육영공원에서 독일영사관이 있다가 일제강점 후 토지조사국, 총독부 별관으로 사용한 서울시립미술관, 정동 교회, 정동 극장 등을 반나절 정도 돌아보며 격랑의 우리 근대사를 체감할 수 있지요."
한일강제병합 100년이던 2010년에 남산의 옛 통감관저 자리를 알리는 표식 설치 문제를 두고 일었던 논란에는 아쉬움을 돌이킨다. 책을 통해 일찍이 이 자리를 세상에 알렸던 그를 비롯해 여러 역사연구가들이 표식 설치를 주장했지만 서울시는 일본 우익에 이용당할 수 있다며 주저했다. 결국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안내물을 만들었고 서울시는 이를 묵인하는 어정쩡한 상태다.
"역사는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쓰고 그걸 교육의 기회로 활용하면 될 텐데." 발로 뛰어 자료를 고증해 가며 근대사의 현장들을 책으로, 답사로 되살려 내고 또 고쳐 써가는 그의 바람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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