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르신도 아이들도 없는 텅 빈 골목길… 한때 존재했던 공동체를 추억하다
콘크리트 숲에서 자란 젊은 세대에게 없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구불구불한 골목길의 추억이다. 우르르 골목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땅거미 질 무렵의 음식냄새와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한여름 밤 골목 끝 공터에서 열리던 떠들썩한 반상회까지.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경험한 이들에게 골목길은 아련한 기억의 처소이자 각박한 삶 속의 숨구멍이다.
2000년대 들어 골목길은 개발 논리에 밀려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한쪽에선 유년의 기억과 그곳에서 생성된 문화마저 뿌리째 뽑히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도 고조된다. 서울 삼선동, 서계동, 한남동 등의 골목길을 두 발로 걸으며 지도로 남긴 임석재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는 <서울, 골목길 풍경> 에서 "골목길은 우리 삶의 역사이자 문화이며, 문화재"라고 강조한다. 서울,>
골목길을 기록하는 사진작가 김재경씨의 작품에도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지난해 11월 열린 그의 사진전 '뮤트2(MUTE2): 봉인된 시간'에는 금호동, 명륜동, 중림동 등 서울에 몇 안 남은 '달동네' 골목길이 흑백의 풍경으로 선보였다. 건축사진가로 유명한 김씨가 1999년부터 서울 골목길을 담아온 뮤트(MUTE) 시리즈의 두 번째 작업으로, 좁다란 골목길과 그곳에 남은 사람의 흔적에 포커스를 맞췄다. 봄이 무색하게 찬바람이 몰아치던 3월 말 김씨의 카메라에 담겼던 '그곳', 서울 충신동 골목길을 함께 찾았다.
건축사진가의 눈으로 바라본 한국의 골목길
먼저 김씨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새로 지어지는 건축과 사라져가는 골목길의 관계는 언뜻 희박해 보인다. 오히려 대척점에 놓여있다고 봐도 좋다. 하지만 김씨에게 이 두 작업은 도시 주거라는 하나의 관심사로 묶인다. 이밖에도 그는 하나의 테마에서 스무 개의 크고 작은 프로젝트로 곁가지를 쳐왔다.
1990년 건축잡지를 시작으로 건축사진에 입문한 김씨가 골목길을 포착한 때는 새 밀레니엄 맞이로 지구촌이 떠들썩하던 1999년. 충신동을 비롯한 산동네에 밀집된 군락이 아름다운 패턴처럼 느껴지던 시절도 있었지만 내부 사정은 외면한 채 피상적으로 예쁜 이미지를 좇는 사치를 부릴 수는 없었다. "밀레니엄을 파라다이스라고 여기지만 변하지 않는 가치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우리가 잊고 사는 골목길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환기죠. '뮤트'는 말 없는 지적일 수도 있고, 고요한 항거이자 저항이기도 합니다."
주로 계단과 낡은 집을 촬영한 '뮤트' 시리즈에서는 건축사진가의 면모가 엿보인다. "계단은 사람과 주변 환경을 맺어주는 일차적 건축 요소이자, 대표적인 건축 어휘"라는 임석재 교수의 정의대로 건축의 동선을 읽어내는데 효과적인 계단은 마을과 사람 간의 동선을 보여주는 데도 효과적이다. 거주자들이 각자의 편의에 맞게 손수 만든 계단은 수많은 이들의 손길만큼이나 제 각각의 모양을 뽐낸다. 김씨가 포착한 계단은 건축적인 동시에 역동적이다.
그의 골목길은 2009년 '뮤트2' 시리즈로 재개된다. 최근 몇 년 사이 자본의 횡포 속에 뉴타운을 비롯한 500여 곳의 주거지를 둘러싸고 많은 문제가 불거졌다. 특히 아현동, 가재울, 왕십리 등은 주민들의 이주가 이뤄지고 기존의 삶 터마저 사라졌지만 새로운 터전도 건립되지 않고 있다. 삶의 흔적이 사라지고, 삶의 흔적도 남길 수 없는 텅 빈 공간과 시간. 그가 다시 골목길로 파고든 이유다.
"도시는 점점 자라기도 하고, 도시민에게 편의를 제공해야 하는 역할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빠르면 놓치는 게 많죠. 과거를 지운 현재보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은 도시를 한층 풍성하게 하거든요." 도시 주거에 관한 이 같은 고민은 '뮤트2' 시리즈에 담겨있다. 그 때문인지 흑백 사진과 골목길이란 어감에서 전해질 법한 막연한 감상주의나 낭만성은 그의 사진에선 휘발되고 없다.
1970년대와 2000년대 골목길은 무엇이 다른가
다시 충신동 골목길로 들어서기 전 마을 초입의 언덕. 지하철 1,4호선 동대문 역 1번 출구, 이화여대 부속 동대문병원이 있던 자리 부근에서 충신동으로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비탈진 산자락에 자리잡은 데다 문화재인 서울성곽에 붙어 있는 이곳은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었음에도 변화의 속도는 더딘 편. 비탈길을 조금만 올라도 성곽 건너편의 창신동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김씨는 "자연태생적인 길은 원래 구불구불하기 마련인데, 평지가 아닌 산자락에 있다 보니 계단이 많고 입체적으로 발달되어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언덕을 조금 더 오르면, 큰 길 옆으로 예상치 못한 가파르고 좁다란 골목길이 실핏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성인 두 명이 겨우 지나가거나 때론 혼자 걸어야 할 정도의 너비. 조금 과장하면 앞집 사람의 숨소리도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지만 어쩐지 골목길엔 온기가 없다. 유유자적하게 말벗을 찾아나선 어르신이나 골목길을 쩌렁쩌렁 울리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까. 홀로 혹은 둘이 조용히 오가는 사람이 종종 목격될 뿐이다.
김씨는 가던 길을 멈추고 빨랫줄로 문이 잠긴 초록 대문을 가리켰다. "여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거예요, 아마. 앞집 할머니가 좀 봐주셨던 것 같은데…." 여러 번 오가던 동네라 주민 소식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 모양이다. "달동네엔 형편이 넉넉지 않은 독거노인들이 방 한 칸 얻어 월세를 사는 경우가 많죠. 도시가 말끔하기만 하면 이런 분들이 깃들 곳이 없는 거죠. 주변이 깔끔하게 정리될수록 원주민은 변두리로 밀려가고, 그러면 계층의 문제는 더 심각해집니다."
현장에서 목격하듯, 2000년대의 골목길은 확실히 1970년대의 그곳과는 다르다. 사진으로도 변화는 여실히 읽힌다. 1960년대 후반부터 30여년간 중림동, 행촌동 등을 돌며 골목길의 정감 어린 풍경을 담아낸 사진작가 김기찬(1938~2005)은 골목길 사진에 유의미한 족적을 남겼다. "골목에서 고향과 따스한 인간의 본성을 목격했다"던 그는 아이들이 뛰어 놀고, 텃밭을 가꾸고, 빨래를 말리는 골목이 스쳐 가는 통로가 아니라 놀이터이자 생활의 연장임을 보여줬다. 유년시절을 골목길에서 보낸 이들이 추억하는 골목은 대개 이런 모습이다.
그러나 김씨의 사진 속엔 사람이 없다. 텅 빈 골목길에선 적막감, 심지어 상실의 공허함마저 느껴진다. 그가 골목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진평론가 진동선씨는 <한 장의 사진 미학> 에서 김재경의 사진을 이렇게 평한다. "그것은 한때 삶의 유대로서 존재했던 우리의 공동체성의 해체이며 상처받은 어제의 신뢰에 대한 신화적 상징이기조차 하다. 한쪽을 비추어서 나머지 한쪽을 알게 하는 사진, 바로 김재경의 사진이다." 한>
그의 사진은 현대의 골목길을 반영한다. 머무름보다는 떠남이 익숙한 시대, 이웃과 마음 터놓고 지낼 수 없는 각박한 세상. '커뮤니티를 상실한 골목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되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란 질문에 그는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공동체 해체에도 남은 이야기성
한 소년이 제 집을 찾아 들어간 막다른 골목. 김씨는 그 골목의 가구수를 세기 시작했다. 대문은 세 곳이지만 따로 들어가는 계단이 더 있는 것으로 보아 대여섯 가구는 사는 것처럼 보인다. 때마다 지어 올린 것 같은 투박함이지만 이 정도로 밀도가 높고 견고한 동네도 드물단다. 어딜 가도 평지보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많은 이곳은 걷는데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다. 한번 지나온 집을 다시 찾아가라면 못할 것 같아도, 그 변화무쌍함에 자꾸만 이곳 저곳을 걷게 된다.
이런 다양성과 불규칙성은 자꾸만 골목길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요즘 충신동 바로 옆 동네 이화동엔 알록달록하게 마을 곳곳에 그려진 공공미술 벽화를 보기 위해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찾는 이들이 늘었다. 이중 몇몇은 이어지는 충신동 골목길까지 들어서기도 한다.
"인사동을 풍부하게 만든 건 잎맥 같은 골목길이죠. 그런데 넓은 길에 있는 인사동 쌈지길은 또 하나의 골목길 풍경을 만들어요. 보통 상업지구는 눈에 띄기 위해 밖으로 도드라지게 나오기 마련이지만 그 통념을 깼죠. 오히려 안으로 쑥 들어와 가게가 뱅 둘러 있고, 뱅뱅 돌며 3층까지 이어지죠. 입구가 일종의 사람을 빨아들이는 구멍인 거예요. 이런 형태는 무심코 지나칠 것 같지만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하고 동네를 풍성하게 하죠." 해체된 공동체에도 불구하고 골목길이 남아있어야 할 이유에 대한 그의 답변인 셈이다.
골목길에 개인적으로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이렇게 말한다. "골목길에 오면 평온함을 느껴요.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속담처럼 평범한 일상에서는 어떤 대상을 주목하기 어렵지만 떨어져 있으면 그 대상의 빈자리를 바로 눈치채게 되잖아요. 골목길 역시 마찬가지예요. 낙후된 주거지 개선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 방법에 대한 고민은 충분히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옆집과의 미묘한 심리적인 갈등부터 오랜 세월 켜켜이 쌓아온 한국사의 단면까지 덧대어진 골목길. 김씨는 "이곳의 축적된 이야기는 어떤 뛰어난 건축가도 당장 재현해낼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 컬러 디카로 건축 사진… 흑백 필름으로 골목 사진…
사진작가 김재경씨는 극단의 대상을 오가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 지어지는 건축물과 점점 자취를 감춰가는 낡은 골목길. 건축가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디자인한 건물을 보여주는 것이 전자라면, 살면서 덧대어진 자연스러운 흔적들은 후자에 남아있다. 말끔하게 차린 앞모습이 신축된 건물이라면, 꾸밀 수 없는 뒷모습의 여운이 골목길에 있다.
김씨가 처음 관심을 가진 계단에도 이 둘의 차이는 확연하다. 신축 건물의 건축가는 계단에 동선뿐 아니라 공예적인 감각을 살리려고 하지만 골목길의 수많은 계단에서는 동선과 함께 사유재산의 행사가 두드러진다. 여러 가구가 사는 다세대 주택에도 각자의 문으로 향하는 계단이 따로 놓여있다. 먼저 놓인 것과 나중에 놓인 것이 보이고, 이용자의 편의에 맞춰 각도도 조절되었다. 누군가는 블록을 쌓아 시멘트를 바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수도 파이프에 계단 역할을 부여하기도 한다.
"빗물이 넘어오지 않게 하려고 경사를 만드는 등 필요에 의해 덧대는 게 많죠. 일상에서 나오는 번득이는 재치와 아이디어 중엔 건축가들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아요."
그는 카메라도 달리 사용한다. 건축사진은 디지털 카메라로 컬러사진을 찍지만 골목길은 흑백의 필름 카메라를 쓴다. 왜 색채를 달리하느냐고 묻자 한참 뜸을 들이던 그가 말했다.
"흑백의 모노톤은 인간이 볼 수 없는 세계죠. 컬러인 경우라면 색조로서 여러 이야기를 도드라지게 할 수 있지만, 흑백은 그 잠잠함이 오히려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 같아요. 도드라진 대로변보다 옴폭한 골목길이 오히려 사람을 가만히 끌어들이는 것처럼요."
그가 좁다란 골목길을 촬영하기 위해 사용하는 카메라는 골목과 벽면을 사람의 시각처럼 담아내는 파노라마 카메라다. 광각렌즈는 가까운 것은 더 크게, 뒤쪽의 것은 더 작게 표현하기에 계단이나 집 자체가 아닌 골목이란 공간을 촬영한 'Mute 2' 시리즈부터는 이 카메라를 사용했다. 인화한 사진은 가로로 길게 나온다.
건축과 골목길, 두 사진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미지를 과장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김씨의 사진은 사진평론가 진동선씨의 말대로, '가장 알맞은 거리에서 우리를 향하고 우리로 하여금 가장 알맞은 거리에서 그것들을 향하게 한다.'
이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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