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슬아슬 삶을 낚는 노인, 그 어깨 위를 불꽃같은 태양이 부축하고…
서양배처럼 생긴 스리랑카가 수박만하게 그려진 지도를 폈다. 파란색 볼펜으로 콜롬보부터 남쪽 해안도로를 따라 골(Galle)까지 선을 그었다. 눈대중으로 120㎞ 남짓. 골은 바다에 장대를 박아놓고 거기 매달려 고기를 잡는 독특한 외다리 낚시_스틸트 피싱(stilt fishing)_를 접할 수 있는 지역이다. 남아시아 국가들을 안내하는 가이드북의 표지를 단골로 장식하는 이(異)세계의 풍경. 하지만 일정표엔 골이 없었다. 없으면 어때. 일행을 꼬드겨 '일정'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했다. 그리고 약간의 좌충우돌 끝에 인도양에 낚시찌처럼 떠 있는 인간을 만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줄곧 그러했다. 계획을 벗어난 곳에서 마주치는 문화와 자연, 또는 일상과 신(神)의 낯선 뒤엉킴. 아마 그것이 스리랑카의 매력인 듯했다.
'그냥 노선번호 달린 완행버스를 타도 되겠군.'
잘못된 생각이었다. 콜롬보에서 골까지 한 시간 반이면 될 줄 알았는데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기온은 섭씨 35도였고 동네마다 서는 버스는 내내 만원이었다. 남한의 3분의 2 정도에 불과한 스리랑카의 국토 면적은 이동 수단에 대해 큰 고민을 갖게 만들지 않는다. 대개 그것이 여행객들이 범하는 첫째 실수다. 이 나라에는_개통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짤막한 남부(southern)고속도로를 제외하면_아직 고속도로라는 게 없다. 중앙선의 구획도 희미해 차들은 치킨게임을 하듯 좌우를 넘나들며 질주하지만 그래 봐야 속도는 스쿠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같은 거리라면 다른 나라에 비해 넉넉히 세 배쯤 이동 시간을 잡아야 한다.
땀냄새에 코가 마비된 지 한참 만에 골에 도착했다. 수십㎞에 이르는 베이지색 해변이 야자수의 녹색 띠를 두르고 인도양의 윤곽을 보여주는 곳. 하지만 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가 또렷한 세인트조지 플래그(잉글랜드 국기)의 펄럭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도심에서 잉글랜드와 스리랑카의 크리켓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영국에서 몰려온 응원(관광)객으로 도시는 소란했다. 스리랑카는 18세기 말부터 지난 세기 중반까지 영국의 식민지였다. 지금도 공용어인 싱할라어보다 영어로 된 간판이 많다. 입장권을 못 구한 영국인들은 높다란 성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보다 두 세기 전에 이 나라를 지배한 포르투갈인들이 세운 성채다.
이 지면에 두터운 식민의 역사를 늘어놓을 여유는 없다. 다만 스리랑카의 아름다운 남서부 해안에서 어딘지 다른 문화권의 정취를 느끼게 된다면, 그것이 아랍인들의 바닷길 개척 때부터 시작된 핏빛 억압의 흔적이라는 것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겠다. 해질녘, 골의 흙벽돌 지붕들이 등자열매 빛깔로 하늘을 반사했다. 노을은 누추한 골목과 최고급 리조트를 가리지 않고 스몄다. 그걸 오래 보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바다로 가야 했다. 이곳 어부들이 위태하게 나무장대에 삶을 매달아온 연유를 추적할 여유 역시 이 지면엔 없다. 그날 저녁 늙은 어부 하나가 향합 속 성냥처럼 바다에 박혀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04년 쓰나미로 숱한 낚시꾼의 목숨을 삼켜버린 바다다. 떨어지는 해가 그의 머리에서 발화하는 성냥불꽃과 같았다.
이튿날 복귀한 '일정'은 문화 삼각지대로 불리는 아누라다푸라, 폴로나루와, 캔디 세 중세도시를 잇는 길이었다. 직접 본 뒤엔 찬란하다는 진부한 말을 쓸 도리밖에 없었다. 협소한 국토와 외진 위치에도 불구하고 스리랑카가 이룩한 중세의 문화는 위대했다. 오랜 세월 전, 그들은 돌과 흙과 쇳덩이로 열대의 숲 속에 싯다르타의 말을 구현했다. 숱한 전란으로 폐허가 된 곳이 많았는데 최근 유네스코의 복구작업이 대부분 마무리됐다. 그런데 웅장한 사원보다 인상적인 것은 곳곳에서 마주치는 광대한 호수가 모두 수세기 전 축조한 인공 저수지라는 사실. 스리랑카는 건기에 물이 부족하다. 과거 권력자들은 저수지 축조를 통해 자신의 힘을 확인했다. 왕과 왕조가 바뀔 때마다 스리랑카인들은 산을 파고 골을 메워야 했다. 그 수고를 가늠할 방법이 없었다. 그 저수지엔 지금 고깃배가 떠 있었고 곳곳에서 사람들이 목욕과 빨래를 하고 있었다.
높이 195m의 돌산이 통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시기리야는 폴로나루와에서 캔디로 가는 중간에 있었다. 5세기 권력에 눈이 먼 카샤파왕이 부왕을 폐하고 동생의 복수가 두려워 난공불락의 돌산 위에 세운 도시다. 영어를 배우고 있다는 스리랑카 학생이 다가와 더듬더듬 시기리야의 역사에 대해 말해줬는데, 그의 서툰 영어 속에서 다시 저수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서자였던 카샤파는 혈통이 좋은 동생(목갈라나)에게 왕위를 뺏길까 두려워 아버지를 감금하고 가진 재산을 모두 내놓으라고 했는데, 아버지 다투세나왕은 자신이 축조한 칼라웨와 저수지로 그를 데리고 가서는 "이것이 내가 가진 전 재산"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시기리야는 인간 욕망의 무상함 위에 우뚝 솟아 전세계의 여행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캔디의 구릉지대로 가는 길은 열대의 정글 속으로 뻗어 있었다. 기사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사고가 났나 싶어 창 밖을 보니 야생 코끼리떼가 길을 건너려 하고 있었다. 신기한 마음에 차에서 내리려고 하니 기사가 사색이 돼 손사래 친다. 동물원에서 길들여진 코끼리와 달리 야생 코끼리는 시속 60㎞까지 달리는 사나운 맹수란다. 스무 마리, 아니 서른 마리쯤 되는 무리가 지나는 차들이 거슬리는 듯 다리로 거칠게 흙을 파댔다. 일정은 뜻밖의 사파리 투어로 바뀌었다. 일행은 적잖이 들뜬 기분이 됐다. 그런 '뜻밖'은 여행 중 몇 번 반복됐다. 식민의 자취가 서린 유럽풍 도시와 부처의 피톨이 도는 중세의 돌산을 지나 때묻지 않은 야생의 땅을 마주치게 되는 곳. 숫자로 표기되는 면적으로 한정할 수 없는 너른 대지가 '인도양의 눈물' 스리랑카에 담겨 있었다.
골ㆍ아누라다푸라ㆍ폴로나루와(스리랑카)
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여행수첩/ 스리랑카
●한국에서 스리랑카로 가는 직항편이 없다. 방콕이나 싱가포르에서 콜롬보로 이어지는 항공편이 매일 있다. 스리랑카항공 www.srilankan.com 싱가포르항공 www.singaporeair.com 시차는 3시간 30분이다. ●연중 기온 변화가 크지 않다. 건기와 우기로만 나뉜다. 남서 지역은 5~9월, 동북 지역은 11~3월이 우기다. 중부 고원지대는 기온이 꽤 낮다. ●비자를 받아야 한다. 전자사증 발급 사이트(www.eta.gov.lk)에서 간단하게 신청할 수 있다. 스리랑카관광청 홈페이지 www.srilanka.travel.
■ 스리파다엔 공존의 발자국이 오롯이…
스리랑카는 다양한 신들이 어울려 사는 세상이다. 물론 다수 종교는 불교다. 인구의 69% 가량이 불교도다. 태국과 버마(미얀마) 다음으로 비율이 높다. 그러나 15% 정도의 힌두교도, 각 7% 가량의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도 자신의 종교를 감추지 않고 산다. 힌두교를 믿는 타밀족 반군과의 오랜 내전 탓에 종교 갈등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그건 종교보다 정치의 문제에 가깝다. 일상의 불교도와 힌두교도들은 이웃으로 뒤엉켜 지낸다. 곁에서 보니 그건 굳이 공존이라는 단어가 필요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삶의 양태로 느껴졌다.
신앙의 역사가 깊은 만큼 종교 유적을 둘러보는 것이 스리랑카 여행의 큰 부문을 차지한다. 콜롬보에서 불교 유적이 밀집한 중부 내륙으로 가는 길은 동북쪽으로 뻗는다. 그러나 길을 잠시 우회해 북쪽의 항구 네곰보를 찾아가면 또 다른 스리랑카의 표정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포르투갈 식민지배 시절 중심 항구다. 유럽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주민이 가톨릭 신자다. 해변을 따라 늘어선 십자가의 집들이 지중해의 어느 바다를 떠올리게 만든다. 스리랑카에서 만나는 오래된 교회의 분위기가 무척 새롭게 다가왔다.
햇살이 아직 부드러운 아침 이곳을 지났다. 해변엔 전세계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리조트들이 줄지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본면목은 어항(漁港). 냉동창고와 복잡한 어구, 동력선의 기관장치로 어지러운 어항만 봐온 눈엔 언뜻 해수욕장으로 보일 만큼 담백한 풍경이다. 너른 백사장은 그물을 털고 생선을 널어 말리는 손들로 분주했고, 멀리 수평선엔 두 폭의 돛을 단 쌍동선(카타마란)이 수백년 전 모습 그대로 떠 있었다. 천진한 표정의 어린 아이들이 웃고 떠들며 낚시를 하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어부들의 목에 걸린 은빛 십자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네곰보를 벗어난 왕복 2차선 도로는 북동으로 급히 꺾어져 불교 성지 아누라다푸라로 구불구불 좁게 이어졌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관광객이 이렇게 많이 찾아오는데 그 수입을 다 어디 쓰느라 변변한 길도 닦지 못했을까. 말을 돌리다가 슬쩍 물어봤다. 예순 줄의 가이드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난 20여년, 우린 전쟁 말고 다른 곳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부처의 땅이 있는 북동쪽으로 갈수록 군부대를 마주치는 빈도가 높아졌다. 2년 전 평정된 타밀 반군의 거점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했다.
아누라다푸라. 2,500년 전부터 1,000년 넘게 이곳은 스리랑카의 중심 도시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 당시 집들은 지하 2층, 지상 2~3층으로 지어졌으며 왕은 보석으로 장식한 1,000개의 방이 있는 궁전에서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돌로 된 다가바(탑)와 사원 일부만 남아있다. 다가바의 규모가 워낙 커 폐허의 모습 또한 장엄하다. 이곳엔 2,000년 넘게 살아있는 성물(聖物),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인도의 보리수 가지를 기원전 3세기에 가져와 심은 보리수가 있다. 도시도 죽고 사람들도 모두 떠난 뒤 스무 세기를 홀로 정좌한 보리수는 정각(正覺)을 이루었을까.
담불라와 아루비하라로 이어지는,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의 불교 유적은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원엔 간절히 기도하는 노인도 있고, 놀이공원에 온 것처럼 신나게 떠드는 아이들도 있고, 신들의 궁전을 안내하는 듯 흥분한 가이드도 있었다. 아누라다푸라와 달리 여행객의 존재는 소음에 파묻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엄격한 임제종 가풍의 북방 선불교만 봐온 여행객의 눈에, 책 속에서 읽은 부파불교의 후예들은 예상과 달리 발랄하게 비쳤다. 빨리어로 외는 만트라는 금강경의 일부 같았다. 영어를 쓰는 가이드들은 그 뜻을 설명하지 못했다.
캔디의 고지대로 높아지는 어름에서 다시 흥미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히잡을 쓴 무슬림의 여인들이 많아지는 듯하더니, 어느 마을에 이르자 다시 힌두교 사원이 화려한 외관을 내보이고 있었다. 일일이 멈춰서 사연을 물어보기엔 일정이 너무 촉박했다. 스리랑카엔 스리 파다라는 산이 있다. 산꼭대기에 발자국이 하나 있는데 '스리 파다'는 '성스러운 족적'이라는 뜻이다. 불교도는 부처, 힌두교도는 시바신, 이슬람교도는 아담, 기독교인은 성 토마스의 발자국으로 부르며 함께 참배한단다. 여러 신들의 축복이 섞여 윤택한 평화가 가능한 듯 보였다. 이 나라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스리랑카라는 국호는 '찬란하게 빛나는 섬'이라는 뜻이다.
네곰보ㆍ아누라다푸라ㆍ캔디(스리랑카)
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