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대구의 한 중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를 남겼다. 동료들의 집단폭력과 따돌림을 견디다 못해 세상을 하직하노라고 썼다. 대전의 여고생, 광주의 중학생이 뒤따랐다. 새삼스런 일은 아닐지 모른다. 청소년 자살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이니. 그러나 충격이다. 국제사회에서 '교육왕국'의 평판을 얻은 나라의 장래가 걱정이다. 마침내 경찰이 직접 나섰다. 학교폭력의 '근절'을 위해 강도 높은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선언했다. 학생사이의 폭력을 범죄로 다스리겠다는 것이다. 대대적인 범죄 예방교육에 덧붙여 소위 '일진'과 같은 불량서클을 박멸할 각오다. 경찰로서는 신나는 일이다. 마치 성인 '조폭'을 일망타진하는 듯한 사명감과 성취감을 만끽할 수 있으니. 117, 학교폭력을 전담하는 신고전화를 개설했다. 학원은 경찰의 상시 감독 아래에 들어갔다. 학교마다 '폭력추방' 표어 모집과 글짓기 대회가 열렸다. 그러기를 100일, 이젠 한 고비를 넘었다고 한다. 성과도 상당하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성과인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확산된 셈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경찰이 학교를 상시 감독할 수는 없는 일이다. 조만간 손을 떼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시간문제일 뿐, 반드시 폭력은 되살아 날 것이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갈등과 충돌이 많은 사회인데 학교라고 해서 폭력이 횡행하지 않을까. 성인범죄가 늘면 청소년 범죄도 늘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보고 자란 것이 폭력이요 범죄이니까. 학교폭력은 반짝 효과로서 절대로 '근절'될 수 없는 사회악의 일부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짚어 보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학교에는 오래 전에 '스승'이 사라졌다. 초등학교에는 촌지교사가, 중고등학교에는 대학입시 교사가. 대학에는 지식상인이 옛 스승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나마 근래 들어 촌지교사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스승의 지위를 잃어버린 선생은 매를 들 수 없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사랑의 매가 아니라 권력자의 폭력이기 때문이다. 선생에 대한 존경이 사라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세태다. 좋아하는 사람만 있지 그 누구도 존경할 줄 모르는 요즘 아이들이다.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가장 큰 이유는 가정교육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학교교육이 실종된 것이 아니다. 부모가 인성교육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내 아이 소중한 줄만 알았지, 남의 아이도 귀중한 줄은 모른다. 내 아이가 남에게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도록 만드는 데 골몰할 뿐,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배려는 안중에 없다. 중학에 입학하기 무섭게 대학입시 전선에 투입된다. 학생은 전사가, 부모는 지휘관이 된다. 입학전선에서 낙오한 아이들은 일상의 낙이 없다. 결손가정의 자녀들은 처음부터 설 곳이 없다. 폭발하는 신체는 탈출구를 찾는다.
학교폭력은 입시전선에서 낙오한 청소년들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방법이다. 선악의 관념이 제대로 서지 않은 '일그러진 영웅'들의 소영웅심의 발로다. 예전에도 학교폭력이 있었다. 낯선 자, 나와 다른 자는 적으로 다스리던 전쟁의 윤리가 청소년의 의식세계에 고스란히 투영되었었다. 그러나 그때는 학생 스스로 갈등을 해결하는 집단적 자정 능력이 있었다. 게다가 스승이, 부모가, 지역사회가 나서서 모두를 품어 안았다.
학교폭력의 근본원인은 선량한 공동체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개성이 무시된 교과과정, 무한의 입시경쟁, 물신주의, 이 모든 것이 원인이다. 학교에서 스승이 사라졌다. 집에서는 엄한 할아버지가 사라졌다. 서로 부대끼며 주장과 이익을 각축할 형제자매도 없다. 떼를 쓰고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는 습관만 키운 아이들이다. 그러니 바깥세계에서 경쟁력이 있을 리 없다. 좌절하면 쉽게 도피할 길만 찾는다. 학교폭력과 청소년 자살, 총체적 위기에 선 우리사회의 한 단면이다. 해결방법은 단 하나, 모두가 서로 사랑하고 품어 안는 마음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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