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화. 대중들의 귀에 무척이나 익숙한 이름이다. 그러나 충무로와 연결 지으면 무척이나 낯선 존재가 된다. 1987년 잡지사 기자를 연기했던 '레테의 연가'가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었으니 당연한 일. 대학로가 둥지였던 이 천생 연극배우가 25년 만에 스크린 나들이를 했다. 26일 개봉하는 '봄, 눈'에서 말기 암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해야 하는 중년여인 순옥을 연기했다.
봄눈이 흩날리던 3일 오후 서울 가회동 한 카페에서 윤석화를 만났다. 순옥에게 육신을 내주기 위해 삭발했던 머리는 쇼트커트로 자라 있었고, 봄눈이 내려 앉은 듯 보기 좋은 회색 빛을 띠고 있었다.
충무로와의 오랜 단절 이유가 궁금했다. 윤석화는 "아무리 좋은 시나리오가 있어도 제가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영화가 지나치게 유행을 타고, 젊은 배우들에게만 맞춰져 제 나이에 할 수 있는 영화가 없었어요." 그는 "구멍가게 주인이든 뭐든 역할을 가리고 싶지 않은 마음인데 감독들 입장에선 제가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른다"는 해석도 곁들였다.
윤석화는 2년 전부터 유명 뮤지컬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단짝 작사가 팀 라이스의 초대로 영국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다. 뉴욕 브로드웨이와 함께 세계 공연산업의 빅2로 꼽히는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지난해 상연된 연극 '여행의 끝'에 아시아인 최초로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다. 올해는 동명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를 무대로 옮기는 '톱햇'의 개막(27일)을 앞두고 있다. 영화에 눈길 한번 주기도 힘든 생활. 그런데 '봄, 눈' 시나리오가 그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정 때문에 어찌 하지 못할 때 김태균 감독이 런던을 찾았다. "4박5일 동안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 감독에 대한 믿음이 생겨 출연을 결정했다"고 그는 말했다.
"사실 '레테의 연가'는 데뷔작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제 목소리는 녹음을 안 하고 성우가 대신해서 반쪽짜리 연기도 하지 않은 영화예요.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부끄러운 흔적입니다. '봄, 눈'은 진정한 저의 영화 데뷔작이라 할 수 있어요."
그는 연극 '덕혜옹주'와 '위트'에 이어 '봄, 눈'을 위해 삭발을 했다. 세 번째면 눈물이 마를 때도 됐을 텐데 사람의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나 보다. 그는 "감독이 미안하다며 먼저 우니 따라서 눈물이 흘렀다"고 말했다.
윤석화는 올해 10월 '딸에게 보내는 편지'로 국내 배우론 처음으로 웨스트엔드 무대에 오를지도 모른다. 영국 극작가 아놀드 웨스커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1992년 그가 국내에서 세계 초연해 10개월간 장기 공연했던 모노드라마다. "93년 런던에서 공부하다 만난 웨스커가 영국 공연에 출연해 달라했는데 그땐 그럴 상황이 아니었어요. 최근에 다시 제의를 해와 고민 중입니다. 일단 모든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 영국 영어 발음 교육을 받고 결정하렵니다. 관계자들 앞에서 시연을 해보고 그들이나 제 마음에 안 들면 접으려고요. 극장까지 잡혀 있으니 제 결정에 달려 있는 것이지요."
카메라 앞에서의 오랜 침묵이 깨졌으니 충무로와의 활발한 교류도 예상된다. 그는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코미디로 사람들을 정말 웃기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는 그 동안 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벽이 있었던 분야입니다. 그러나 영화 쪽으로 저는 문이 언제나 열려 있었어요. 다만 걸어나갈 수 없었던 거죠. 이제 한발을 뗐으니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