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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피로사회

입력
2012.04.02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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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케이블 채널의 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얻고 나서 비슷비슷한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가수 데뷔'를 약속하는 이런 선발 프로그램이 전에 없던 것도 아니어서 한철 유행일까 싶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다. 케이블이 불을 당긴 오디션은 지상파 방송 전체로 확산됐고, 몇몇 인기 프로들은 시즌을 바꿔가며 온 나라를 오디션 열풍으로 몰아 넣었다. 노래 잘 하는 무명의 가수 지망생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실력 하나만으로 정상에 오르는 오디션의 성공 스토리에 대중이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승자와 패자, 환희와 눈물이 교차하는 매회 방송은 시청자들이 손에 땀을 쥐기에 충분하다. 높은 시청률이 이 같은 관심을 입증한다.

최근 한 지상파 방송의 주말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대에 오른 20세 전후 출연자들의 노래 실력은 하나같이 웬만한 가수를 뛰어 넘는 것이었다. 그들의 실력을 가리겠다고 연예기획사를 대표해 나온 가수 출신 심사위원들의 노래 실력보다도 한참 나아 보였다. 물론 상업적으로 성공한 가수가 되려면 노래만 잘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음반을 내도 모자람 없는 젊은이들이 더 이상 무슨 실력을 어떻게 더 가리겠다고 저 무대에 저렇게 목을 매는 것일까. 오디션의 판정이 그들이 가수가 될 수 있음과 없음을 가리는 것도 아닌데 왜 그들은 그 어눌하기 짝이 없는 심사평에 매번 승패의 눈물을 삼키는 걸까.

이 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해명해주는 듯한 책을 최근 만났다.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에서 현대철학을 가르치는 한병철 교수가 쓴 문화비평서 <피로사회> 다. 2010년 독일에서 첫 출간됐을 당시 독일 문화ㆍ언론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는 이 책에서 한 교수는 근대를 규율사회로, 후기근대를 성과사회라고 설명한다. 그는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단에 이르면, 자기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고 말한다. 규율사회에서 '타자에 의한 강제'는 성과사회에서는 '자유를 가장한 자기강제로 대체'된다. '자기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 자아는 자신과 '전쟁'을 치르며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하고 만다.

한 교수가 성과사회를 대변하는 이 시대의 고유한 질병으로 거론하는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같은 신경증적 질환(21세기의 우리를 진실로 병들게 하는 것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아니다!)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숫자로도 뚜렷이 확인된다. 우울증과 조울증 등을 포함한 기분장애 환자는 해마다 꾸준히 증가해 2010년 68만 명을 넘어섰다. 수면장애를 호소하는 사람들은 최근 5년 사이 2배가 늘었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극도의 불안에 사로잡히는 공황장애 환자는 2006년 3만 5,000명에서 지난해 5만 9,000명으로 증가했다. 자아가 소진된 뒤 오는 가장 극단적인 선택은 자살이다. 2010년 국내 자살자 숫자는 1만 5,566명으로 34분마다 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1년(3,151명)에 비해 무려 5배나 늘어났다.

"TV라는 게 그냥 재밌으면 되는 거 아니냐"거나, "불공정이 판을 치는 한국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고 찬사를 보내는 사람도 적지 않으니 오디션 열풍의 배후를 이렇게 캐고 드는 건 너무 비관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연예기획사를 차려 6년만에 가요계에 컴백했다는 그룹 룰라 리더 이상민이 최근 연습생을 모집하며 한 이 말만은 다들 기억했으면 좋겠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범람으로 음악이 경쟁의 한 종목이 돼 버렸다. 음악이 순수하게 갖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잃고 언제부터인가 잘하는 사람들만의 것이 된 현실이 마음 아프다. 1등만 주목하는 기존 오디션 프로그램에 반대한다. 나는 음악 자체를 순수하게 즐기고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김범수 문화부 차장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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