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추석이 지나자마자 길을 떠날 작정을 했다. 건어물과 소금 지게를 지고 열두 고개 넘어 산간 마을을 다녀온 장돌뱅이 안 서방이 그의 소식을 들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의 소식이랬자 별로 시원한 내용은 아니었다. 안 서방이 들었다는 소문은 그 웬수가 덕유산 자락 어딘가에 자리를 틀고 앉아 도를 닦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 위인이 한자리에 궁둥이를 붙이고 있다는 소리도 어딘가 걸맞지 않건마는 더구나 도를 닦다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니, 도라면 재작년 그러께 온 세상을 들었다 놓고 도처에서 피박살이 나버린 '천지도'란 요물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겐가. 애고, 복도 없고 가련한 이내 팔자.
내 이름은 연옥이고 다리목 객주의 주인이다. 여기 온 지는 벌써 십 년이 넘었다. 내가 여기 오기 몇 해 전에 우리 엄마 구례댁이 먼저 주막을 벌여놓았다. 툇마루가 길게 달린 길목도 좋은 남도 식 일자집을 그녀가 내 혼사로 얻은 돈으로 장만했다고 한다. 내가 여기 온 지 훨씬 뒤에야 별채와 창고를 지었고 뒤에 텃밭도 샀다.
우리 엄마는 원래가 월선이라 부르던 관기로 전주에서 살았고, 재예가 그리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남자 후리는 솜씨가 남달라서 스물 근처까지도 신관이 오면 제일 먼저 수청기생으로 지목 될 정도였다. 새로 갈린 관찰사의 먼 친척으로 오입쟁이는 아니었지만 어리숙하고 주변머리 없는 선전관이 와서 객사 손님이 되었더니, 우리 엄마와 눈이 맞았다. 한양 올라가 활터에 드나들고, 세도가 집에 식객 노릇으로 어찌어찌 무과에 나가 선달 거치고 출사하여 선전관 하나 따내고는, 그만 낙향하는 신세였다. 고향에 전답과 선산이 있어 벼슬하겠다고 반나마 팔아 잡쉈지만 그래도 시골 부자였다. 아마도 엄마는 퇴기로 물러나 전주 성내 그러루한 왈짜나 관아붙이를 기둥서방 삼아 한평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던지, 낙향하는 그 양반을 따라서 지니던 패물봇짐 하나 달랑 꾸려서 지리산 아랫녘으로 따라갔고 거기서 내가 태어났다.
조부가 큰사랑에서 정정하게 헛기침하고 있던 판에 한양 갔던 손자가 벼슬은커녕 허울만 좋은 무관이 되어 첩까지 달고 낙향했다면 가문에서 당장 축출될 터라, 아버지는 구례 너머 곡성에 집 사주고 본가와 오락가락하며 살았다. 아무리 숨긴다 하여도 동네 뒷산에 나물 캐러 간다거나, 우물가나 빨래터에 한두 번 나가도 그렇고, 방물장수만 드나들어도 집안일이 동네방네에 풍기게 되어 있어서, 드디어 큰댁 본마누라 귀에는 물론이요 할아버지까지 알게 되었다. 아들이 없다거나 상처한 것도 아닌 바에 위로 아버지 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집안에 축첩한 일이 없거늘, 이게 될 말이냐고 당장 파하라고, 내게는 할머니가 되는 박초시댁 부인이 엄마를 섬돌 아래 무릎 꿇려 놓고 야단치는 모양을 내가 똑똑히 보았다. 아무튼 그 뒤로 집안 대소사가 있을 때면 엄마는 본댁으로 가서 노비들과 함께 일을 거들다 오곤 했고, 나도 어쩌다 엄마를 따라가면 안채나 큰사랑에는 얼씬도 못하고 행랑채 부근에서 혼자 공깃돌만 만지작거리다 돌아오곤 했다. 어느 가을에 아버지가 곡성 집에 들르자 엄마는 못살겠다고 푸념하고는 전주로 나가겠다고 그랬다. 아버지가 몇 번 달래다가 이별전을 마련해주어서 우리 모녀는 전주로 나왔고 엄마는 이내 생기가 돌아왔다.
엄마는 관기로 일찍이 속량 되어 여염살이로 나갔던 처지였지만, 그렇다고 안해본 농사일이나, 삯바느질 침방이나, 떡집이나, 아무튼 양가집 부녀의 일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전주 성내에서 누가 보든지 퇴기이니 할 일이라곤 목로나 주막 밖에는 생업을 찾을 길이 없었다. 전주 대처에 흔해빠진 것이 밥집, 주막, 여각이었는데 그냥 잔술이나 파는 주막을 열어서는 선술집을 면하기 어려워서, 엄마는 예전 알음알이로 기녀 두엇을 연줄로 대놓고 색주가를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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