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수치"
미얀마 국민은 민주화의 영웅 아웅산 수치 여사를 이렇게 부른다. 미얀마에서 수치 여사의 존재감은 정파의 지도자나 영향력 있는 정치인의 차원을 넘는다. 민중과 민주주의의 가시밭길을 함께 헤쳐 온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수치는 1일 치러진 보궐선거를 통해 미얀마 제도 정치권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45명의 의원을 뽑는 미니 선거지만 국제사회는 수치가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 미얀마 민주주의 역사의 이정표로 해석한다. AP통신은 "사반세기 만에 미얀마 국가 통합을 위한 위대한 진전"이라고 표현했다. 로버트 궤벨스 유럽의회 의원은 "수치 여사가 보선에서 당선되면 미얀마의 제재 해제를 가로막을 더 이상의 걸림돌은 없다"고 단언했다.
과도하다 싶은 서방의 헌사는 미얀마 현대사와 궤를 같이한 수치의 민주화 투쟁 이력을 그만큼 높이 샀기 때문이다. 21년의 재야활동 중 가택연금 기간만 15년, 비폭력 투쟁 방식 고수, 군부의 탄압에도 국민의 곁을 지킨 대중성 등이 그를 민주화의 구심점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수치의 정치 입문은 의도된 것이라기 보다 운명이었다는 편이 타당하다. 1945년 미얀마 건국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의 딸로 태어난 그는 청ㆍ장년기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냈다. 영국 옥스퍼드에서 정치학과 철학, 경제학을 공부하고 영국인 남편을 만나 두 아들의 어머니로 평범한 삶을 살았다. 1988년 4월 어머니(킨 치 전 인도대사)의 병환 소식을 듣고 귀국했을 때, 마침 미얀마에서 26년 동안 응축된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88년 8월8일 오전 8시를 기해 행해진 '8888항쟁'이라고 불린 반정부 시위는 62년 군사쿠데타 이후 최대 규모였다. 수치는 독립 영웅의 딸이 민주화의 선봉에 서길 원하는 국민의 여망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수치가 만든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은 창설과 동시에 거센 돌풍을 일으켰다. 이에 당황한 소 마웅 군부정권은 89년 7월 수치를 전격 감금했다. 2010년 11월 해제될 때까지 총 9차례 구금과 석방을 반복한 가택연금의 시작이었다.
수치의 위대함은 평화적 방식에 입각한 비폭력 투쟁에 있다. "부패한 권력은 권력이 아니라 공포다. 권력의 채찍에 대한 공포는 복종하는 사람들을 타락시킨다(공포로부터의 자유)"는 신념 아래 대화와 타협의 노선을 고수했다. 사하로프인권상(1990), 노벨평화상(1991), 광주인권상(2004) 등 그가 받은 30여개의 인권상은 비폭력주의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의 표시였다.
의회 입성을 계기로 수치의 민주화 투쟁 1막은 마무리됐다. 하지만 정치력에 대한 본격적인 검증은 이제부터다. 미얀마 전문가인 마웅 자르니 런던정경대(LSE) 방문연구원은 "군부와 수치는 각각 경제적 고립과 정치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전략적 공생관계에 있다"고 말했다. 군부를 타도 대상이 아닌 국정 파트너로 다룰 수 있는 고도의 정치력이 요구된다는 얘기다. 수치는 최근 "입각 제안이 있더라도 의원직을 포기해야 하는 내각에 진출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군부가 장악한 정부와의 선긋기를 강조한 말로 들리지만, 투사 이미지에 매몰될 경우 미얀마의 정치적 안정은 요원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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