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 신발을 신기도 전에 거짓은 지구 반 바퀴를 돈다'는 말이 있다. 온갖 분칠로 사람들을 현혹하기 쉬운 거짓에 비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지구 온난화에 관한 섬뜩한 경고를 전하며 쓴 '불편한 진실'이라는 말도 때로는 그 맨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조차 고통이 따르는 진실의 속성을 적확하게 표현한 말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 두 말을 엮어 언론의 역할을 정의하자면, '불편하고도 굼뜬 진실에 얼른 신발을 신겨 저만치 앞선 거짓을 따라잡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정의에 비춰볼 때 우리 언론의 현실은 부끄럽고 참담한 지경이다. 공영방송 KBS와 MBC, 국가기간통신사 연합뉴스 노조 등이 유례없는 장기 동시파업을 하고 있는데도 겉으로 보기엔 세상이 별 일 없는 듯 돌아가고 있는 것은, 그간 우리 언론이 얼마나 제 역할을 하지 못했는가를 반증한다.
기자로서 더 부끄러운 것은 기성 언론이 이유야 어쨌든 '불편하고도 굼뜬 진실'에 눈 감고 있는 사이 '유사 언론' 혹은 '대안 언론'들이 그 역할을 끈질기게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정권이 저지르고 검찰이 덮고 언론이 어물쩍 넘어갔던 이 사건은, 시사평론가 김종배씨의 팟캐스트 '이슈 털어주는 남자'에서 사건 은폐에 청와대가 개입한 정황을 폭로하고, 낙하산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한달 가까이 파업 중인 KBS 기자들이 만드는 '리셋 KBS 뉴스9'에서 방대한 사찰 문건을 공개하면서 재점화돼 총선 정국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뒤늦게 고개를 내민 '불편한 진실'을 대하는 일부 언론의 행태가 황당하기 그지 없다. 진실을 좇아 다시 신발끈을 고쳐 매기는커녕 제 편에의 유불리를 따져 사건을 재단하고 음모론까지 슬그머니 꺼내 드는 모습은 한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듯하다.
전 정권 시절 '할 말은 하는 신문'이니 '비판언론' 같은 언론의 공유물을 마치 자신들의 전유물인양 써먹던 한 보수 신문은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엄벌" 발언 등 여당의 목소리를 부각한 머릿기사를 올렸다. 사찰 내용을 소개한 기사 등에서도 '할 말은 하는 신문'답지 않게 MB와 현 여권 주도세력간에 선긋기를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다른 보수지는 한 술 더 떠 'KBS 새노조-장진수-이재화 공조…총선용 기획 폭로'라는 제목으로 음모론을 대서특필했다. 그런데 기사를 아무리 봐도, 문건 폭로 시점이 4ㆍ11 총선 선거운동 시작일이라는 것 말고는 '기획 폭로'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KBS의 대응도 가관이다. 역시 사찰의 대상이었던 김인규 사장은 임원회의에서 보도의 순수성이 의심된다며 불쾌해 하면서도 KBS 뉴스에서 문건을 보도할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하는가 하면, '리셋 KBS 뉴스9'에 참여한 기자 등 13명에 대한 징계 절차에 착수했다.
언론인 출신인 최금락 청와대 홍보수석은 "문건의 80%가 넘는 2,200여건은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가 총리로 재직하던 노무현 정부 시절 문건"이라며 민간인 불법사찰이란 사건의 본질 흐리기에 앞장섰다. 지상파 방송사 보도국장을 지낸 전력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지난주 미국 진보언론의 영웅으로 추앙 받는 이지 스톤의 평전이 번역 출간됐다. 뼛속까지 기자였던 스톤은 1인 독립신문을 통해 모든 언론이 침묵하던 권력의 추악한 면모를 파헤치는데 일생을 바쳤다. 책 제목 는 그가 기자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당부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저명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추천사에 "이 말에는 우리가 깨닫고 있어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시민은 공적 권력을 쥔 그들의 말을 의심하고 회의할 권리가 있다"고 썼다. 그 권리의 일부를 위임 받아 행세하는 우리 언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은 권력뿐 아니라 언론이 감추고 있는 '불편한 진실'에도 메스를 들이대고 있다.
이희정 문화부장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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