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오십에 미혼. 지금까지 만든 영화는 단 두 편. 유명세를 탄 작품은 없으며 가진 돈도 없다. 월세를 미루다 주인한테 맞고 쫓겨나기도 했다.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뜻대로 안 됐다. 1만원으로 한 달을 버틴 적도 있었다. 비루한 삶에 염증이 생길 땐 한강 다리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번번히 도로 내려왔다. 노모 생각도 났지만, 실은 그때마다 영화가 발목을 잡았다. "영화요? 마약 같은 거죠.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는 뭐 그런 거…."
1996년 '어른들은 청어를 굽는다'로 영화판에 뛰어든 류숙현 감독 이야기다. 그는 첫 작품 뒤 3년만에 '아롱이의 대탐험'을 만들기도 했으나 이후엔 이렇다 할 작품이 없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이런 그에게 요즘 볕이 들었다. 희대의 탈옥수 신창원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기로 했기 때문이다. '담(wall)'제작준비에 한창인 류 감독을 30일 만났다.
서울 충무로나 강남 어디쯤일 것으로 예상했던 그의 사무실은 신도시 건설 공사로 먼지 풀풀 날리는 인천 검단에 있었다. '아롱이…' 이후 7년 가까이 기거하던 서대문 인근 사무실에서 월세를 못내 4년 전 쫓겨나면서 큰형의 배려로 이곳으로 옮겼다. 신창원, 경찰, 교도관, 엄마, 새엄마, 다방종업원, 식당주인, 어릴 적 신창원 등등 수십여 명의 등장 인물들이 적힌 캐스팅보드가 사무실 벽면을 가득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 역할을 맡을 배우 이름 자리는 텅 비었다. "감독이 무명이어서 그런지 선뜻 출연하겠다는 배우가 없네요. 캐스팅에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곧 좋은 소식 있겠죠."
예정대로라면 류 감독이 메가폰 잡은 '담'은 지난달에 촬영을 시작했어야 했다. 1997년 부산교도소를 탈옥, 907일간 신출귀몰하며 전국을 무대로 도주행각을 벌이던 신창원의 이야기가 영화로 나온다는 소식이 처음 들리던 올 초, 자신의 입으로 "2월에 크랭크인 할 것"이라고 호언했기 때문이다. "요즘 돈이 보통 영리해야죠. 조건 맞는 투자자 찾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도 일단 촬영 시작하면 투자하겠다는 물주는 몇 군데 잡아 놓고 있습니다." 촬영 착수에 들어갈 종잣돈만 생기면 영화 제작엔 문제없다는 것이다.
돈이 골머리를 앓게 한 적은 처음은 아니다. 이전의 두편 영화 제작 때 모두 그랬다. 야채 가게를 하는 작은 형의 도움과 집의 논을 판 돈으로 제작비를 조달했다. 그런데 흥행에 실패하면서 10억원 가까운 빚이 쌓였다. 이 정도면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할법도 한데 영화에서 마음을 떼지 못했다. "죽어도 영화로 죽고, 살아도 영화로 살겠다고 가족에게 선포했죠."그의'서대문 시대'가 그렇게 시작했다. 서대문역 인근 허름한 사무실에서 먹고 자고 다 했다. 일거리가 없을 땐 월 1만원으로 생활했다. 요금을 제때 못내 전화가 끊기기도 부지기수. 그러면 친구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찾아왔고, 바퀴벌레와 사는 그를 보곤 말렸다. 하지만 버텼다. 보다 못한 영화계 친구들이 시나리오나 제작비 지원을 받게 해줄 요량으로 '인간극장'출연을 제의했지만 뿌리쳤다. "내가 영화감독이지, 배우야?"라고 항변하면서.
흥행 실패 후에도 영화판을 떠나지 않았던 그에게 영화사 대표로 있는 큰형이 일감을 준 것도 영화에 대한 열정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영화관을 대신 운영하는 일을 맡았다. 생활비 정도는 나왔으니 나쁘지는 않았다. 실적도 좋았다. 사업가로 변신하는가 싶더니 4년 전 영화병이 다시 도졌다. 알고 지내던 신창원 지인으로부터 "신창원이 쓴 수기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제가 딱 찾던 이야기다 싶었죠. 한 밤에 전화 한 통 받고 그 길로 전주로 달려간 그날이 아직도 선합니다." 2010년엔 신창원 법정 대리인과 판권계약까지 마쳤고, 신창원과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시나리오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이번 영화도 적자가 안 되리란 보장은 없다. 신창원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에 흉악범을 미화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부정적인 기류도 적지 않다. 류 감독은 "그럴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고 했다. "그가 왜 세상과 '담'을 쌓기 시작했고, 어떻게 남의 '담' 을 넘었는지, '담' 안쪽의 생활은 어떤지 등 신창원의 옥중수기를 통해 그를 담담히 그려내고 싶을 뿐입니다." 영화가 그의 생각대로 만들어진다면 '담'은 신창원의 삶을 그리는 동시에 '영화감독 류숙현'의 삶도 그리지 않을까.
글·사진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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