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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View/ 유럽 反이민주의 촉발한 75년전 바스크 어린이 대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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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View/ 유럽 反이민주의 촉발한 75년전 바스크 어린이 대탈출

입력
2012.03.3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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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5월 21일 밤 400여명의 아이들을 가득 실은 하바나호가 조용히 스페인 빌바오항을 출발했다. 배는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북쪽으로 내달렸다. 제 몸 하나 누일 자리 없는 비좁은 공간, 홀로 낯선 곳으로 향한다는 두려움에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하바나호는 몇 날을 비스케이만의 강풍과 싸운 끝에 영국 남부 사우스햄프턴에 도착했다. 스페인 내전 당시 '바스크의 아이들'이라 불렸던 어린이 대량 탈출의 서막이었다.

하바나호는 이런 식으로 총 10차례 5~16세 어린이 3,826명을 영국으로 수송했다. 3개월 간의 임시 피란이 될 것이란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곧 이어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상당수는 발이 묶였다. 전쟁이 끝난 45년까지도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아이들은 250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모두 농부와 어부, 공장 노동자 등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아들딸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스페인의 소수민족인 바스크인이라는 것뿐이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는 바스크족을 철저히 핍박했다. 부모들은 자식이라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국외 탈출을 계획했고 그 결과 바스크 지역의 어린이 2만여명은 영국과 프랑스, 구 소련, 심지어 멕시코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서유럽이 바스크 어린이들을 받아들인 것은 자비심이나 인도주의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흥정과 체면치레의 결과였다. 영국은 프랑코 정권에 대한 거센 비난 여론에도 불구, 대량 난민을 수용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바스크 아이들을 거부했다. 프랑스 역시 독일 나치의 게르니카 대학살이 자행되고 나서야 피신을 허락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요즘 유럽 전역을 휩쓰는 반 이민주의의 광풍은 이 때 싹튼 것"이라고 평했다.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아이들의 삶은 비참했다. 영국 정부의 도움 따위는 없었다. '바스크의 아이들'이란 별칭도 영국 언론과 정치권이 이들을 얕잡아 부른 말이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은 전적으로 구세군과, 자원봉사자, 교회에 의존했다. 노숙에서 야영을 거쳐 그나마 낡은 수용시설에 들어가기 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영국 보건부에서 일했던 리처드 엘리스 박사는 "4,000명 대부분이 지독한 배멀미 후유증에 시달렸고, 그들이 타고 온 배의 변기통은 금방이라도 넘칠 듯 보였다. 한 마디로 끔찍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고국의 프랑코 정권도 독재를 피해 나라를 등진 아이들을 반길 리 없었다. 권력을 잡은 프랑코는 국외탈출 가족을 배신자로 낙인찍고 명단을 신문에 공개했다. 호세피나 스터브(85)는 "아버지가 수감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붙잡힐까 두려워 영국 시민권을 딸 때까지 돌아갈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이들의 탈출은 이듬해 영국 주도로 진행된 1만명의 유대인 어린이 수송(Kindertransport)의 촉매제가 됐다. 쿠바 공산화를 피해 어린이 1만4,000명을 미국으로 데려온 '페드로 판(피터팬)' 작전, 2010년 아이티 지진고아 입양 운동도 출발점은 바스크 아이들이다.

바스크 아이들은 올해를 끝으로 매년 사우스햄프턴에서 열던 기념행사를 끝내기로 했다. 이미 많은 회원이 사망했고 온전한 육신으로 살아가는 이도 드물기 때문이다. 영국 바스크아이들협회 공동 창립자인 나탈리아 벤자민은 "우리의 발자취가 별로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며 "바스크아이들은 이제 기록으로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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