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줄리언 반스 지음·최세희 옮김/다산책방 발행·287쪽·1만2,800원
진지하고 지적인 전학생 에이드리언은 토니 패거리에게 경외감과 열등감을 불러 일으키며 단박에 무리의 중심이 된다. 주변의 기대처럼 그는 명문대 장학생이 되고, 토니는 평범한 대학에 진학한다. 때는 해방의 기운만큼이나 보수적 기풍이 드세던 1960년대 말 영국. 토니는 여대생 베로니카와 연애를 하지만 성욕까지 해소할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한다. 그녀의 가족에게 푸대접을 받았다는 서운함까지 겹치자 그는 그녀와 결별한다.
졸업반이 된 토니에게 베로니카와 사귀어도 괜찮겠냐는 에이드리언의 편지가 온다. 가장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 당했다는 분노를 누르고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엽서를 보낸다. 졸업하자마자 미국에 가서 떠돌이로 지내던 그는 긴급 호출을 받는다. 집에 돌아온 그를 기다린 것은 에이드리언의 자살 소식이다.
지난해 영국 소설가 줄리언 반스(66)에게 영연방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을 안겨준 이 작품은 토니를 1인칭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이야기의 전권을 쥐고 있는 그는 그러나 믿을 수 없는 화자다. 친구의 자살을 준열한 지성의 소산으로 치켜세우는 그의 꿍꿍이는 친구에게 단지 엽서만 보내지 않았음을 의뭉스레 밝힐 때 드러난다. 순도 100%의 저주와 비난을 담아 보낸 편지도 있었던 것. 친구와 옛 애인, 그녀의 가족을 상대로 비열한 상상력을 총동원하고도 그는 "물론, (편지 내용이) 좀 앞서간 건 사실이다"라며 눙친다. 이처럼 자기본위적이고도 불완전한 기억이야말로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이다.
어느덧 60세 이혼남이 된 토니는 뒤늦게 드러나는 진실들로 인해 궁지로 내몰린다. 그 시작은 베로니카의 어머니 수잔이 죽으면서 그에게 남긴 유언장. 딸과 사귀던 그에게 "베로니카에게 너무 많은 걸 내주지 마"라고 뜻 모를 충고를 했던 그녀는 40년이 지나 "마지막 몇 달 동안 에이드리언은 행복했다고 생각해"라고 끝맺은 요령부득의 유서와 죽은 친구의 일기장, 돈 500파운드를 그에게 물려준다. 오래 전 인연이 끊긴 그가 상속인으로 지목 받은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왜 베로니카 아닌 어머니 수잔이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소유하고 있었던 걸까.
베로니카는 토니에게 엄마의 유산은 "피 묻은 돈"이며 엄마 대신 보관하고 있는 일기장은 절대 내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럴수록 토니는 친구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이 궁금해지고 옛사랑과의 재회에 대한 장밋빛 기대도 커진다. 일기장을 달라는 명분으로 추근대는 그에게 베로니카가 내민 것은 그 옛날 저주의 편지. 얄팍한 반성으로 면죄부를 구하는 그를 그녀가 힐난한다.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217쪽) 내처, 아무렇게나 휘갈겼던 그의 저주가 하나씩 실현돼 빚어진 참상을 똑똑히 확인시켜준다. 그 지옥 같은 현실은 여기가 바닥인가 싶다가 덜컥 내려앉길 거듭하며 토니를(또한 독자를) 충격과 비탄에 빠뜨린다. 그는 그저, 많은 이들이 그렇듯, 자신이 예언자가 될 것임을 예감하지 못했을 뿐인데.
드러나는 진실들은 불완전한 기억으로 구성된 토니의 삶을 허문다. 고교 시절 역사 교사의 말이 뼈아프게 되살아난다. "내가 아는 체하며 역사는 승자의 거짓말이라고 주장했을 때, 조 헌트 영감이 뭐라고 대답했던가? 그는 '그게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것 기억하고 있나'라고 했다."(210쪽) 그는 망연히 회한에 젖는다. "나는 안다, 이제는 바꿀 수도, 만회할 수도 없음을."(254쪽) 그가 특별히 나빴던 것은 아니다. 생이 원래 그런 것일 뿐.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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