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안경점을 찾았다. 문을 들어서면서 주인과 잠시 목례를 나누었다. 그는 이미 한 손님과 얘기 중이다. 오래 전에 주문한 안경을 찾으러 왔을 뿐인데. 그는 더 이상 내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 손님은 이미 안경 여러 개를 살펴보고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다. 주인은 다시 새 안경을 권하고 또 다른 안경을 설명한다. 아! 언제 끝나려나. 스멀스멀 짜증이 피어 오른다. 나갔다가 다시 올까. 저녁 식사를 하고 올까. 주차장까지는 꽤 걸어야 한다. 기다려 보자. 한발 늦은 내가 잘못이지. 마음을 고쳐먹고 찬찬히 두 사람을 지켜본다. 주인은 시종 낯빛 한번 바뀌지 않는다.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순간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 그 한 사람에 대한 집중력이다.
가격 흥정이 시작된다. 주인은 단호하다. 손님이 졸라도 꿈쩍 않고 떼를 써도 요지부동이다. 그러나 시종 웃는 얼굴만은 흐트러짐이 없다. 조르면 다시 설명하고 떼를 쓰면 다시 설득한다. 결국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순간 손님의 얼굴을 본다. 웃음이 흐른다. 가격 때문일까. 아니다. 자신이 충분히 받아들여졌을 때의 표정이다. 충분히 존중 받았을 때의 모습이다. 놀랍다. 손님이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주인은 그를 지켜본다. 이미 25분이 훌쩍 지났다. 주인은 다시 얼굴 가득 웃음을 띈 채 나를 맞는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의 말에는 마음이 배어 있다.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 사람을 대하는 주인의 집중력을 보면서 나를 돌아본다.
나는 사람에게 얼마나 집중하고 있나. 아니 사람에 대한 집중력을 잃어버린 지가 얼마나 됐나. 바쁘다는 것은 핑계다. 일이 많다는 것도 핑계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때문이라는 것도 핑계다. 이유는 한가지다. 내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말이 길어지면 휴대전화를 꺼낸다. 이야기가 느슨하면 이메일을 확인한다. 회의가 초점을 벗어나면 날씨와 뉴스를 본다. 도저히 못 견디면 메일 답장을 쓴다. 이렇게 부산을 떨면서 나는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낸다. 나는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다른 약속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나는 당신보다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런 의도가 아니라면 아마 휴대전화를 꺼 놓았을 것이고 비록 급한 전화가 왔다 해도 무시했을 것이다.
안경점 주인은 돈 때문에 사람에게 집중한 것일까. 그렇다면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거래를 위해서도 사람에게 올인하는데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섬기겠다는 나는 어떤가. 내가 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지 못한다. 사람은 자신을 더 사랑하는 동안에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관계는 겉돈다. 일상의 분주함은 허망하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아무리 큰 업적을 이뤄도 사람의 마음을 다 채울 수는 없다. 사람은 일로 채워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아도 사람에게 집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차고 넘치는 기쁨을 경험한다.
어느 날 13년 함께 살았던 아내에게 뜻밖의 선물을 약속했다. "당신 얘기를 끝까지 들어줄게." 아내는 밤새 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튿날, 그리고 그 이튿날도 밤을 새다시피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아내가 말했다. "여보! 이제 내가 당신을 믿을 수 있게 되었어!" 내 인생에 가장 성공한 날이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말을 해서가 아니라 침묵 속에 아내에게 집중했을 때 비로소 믿음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그 회복이 성공이었다. 그렇다! 사랑은 집중하는 것이다. 사랑은 한 사람 또 한 사람에 대한 올인이다. 그때 비로소 사람과 사람과의 진정한 관계가 살아날 것이고,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조정민 온누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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