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마을 공화국/ 여치헌 지음/휴머니스트 발행ㆍ312쪽ㆍ1만6000원
북미 인디언의 전설적인 전사로 기억되는 아파치족의 제로니모는 19세기 중반 멕시코군, 미군과 밀고 당기는 전투를 거듭하고 있었다. 천부적인 전술과 지략으로 인디언을 승리로 이끌던 제로니모는 어느 날 아파치족 추장들에게 부족 연맹을 결성하고 자신에게 군사 지휘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추장들은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인디언은 왜 소규모 부족사회를 고집했을까. 본업인 변호사 일을 하면서 인디언과 접한 것을 계기로 10년 넘게 인디언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저자가 에서 말하려는 것은 근대 산업사회에 붕괴되어 가는 토착민의 안타까운 처지와 그 가치에 대한 것이다.
그는 책에서 부족이 중심인 북미 인디언 사회가 유럽인들과 미국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그 속에서 인디언들이 잃어버린 전통의 문화와 사회운영 원리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15세기 북미에서 600개 부족 1,200만명에 이르렀던 인디언은 부족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사회였다. 인디언들은 부족끼리 자주 전쟁을 벌였지만 그것은 자원이 없어 그것을 강탈하려는 싸움이 아니라 '파편화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다툼이었다. 자신이 나고 자란 땅과 자연을 알고, 부족 성원 대부분이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부족주의가 생활 전반을 지배했고 부족사회로부터 분리된 더 거대한 정치권력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적'이 필요했고, 그래서 전쟁은 어떤 면에서는 '제의'(祭儀)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개인을 파편화해 그들의 욕망을 한껏 부채질하고 그런 개인을 국가라는 거대 조직으로 통제하는 서구 산업사회의 물결은 인디언들이 그렇게 살도록 놔두지 않았다. 인디언 부족사회는 강, 산, 골짜기 등 특정 장소에 신앙의 본거지를 두고 이를 경배했기 때문에 홀로 땅을 독차지하는 모습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래서는 당연히 신세계 미국의 일원이 될 수 없다. 미국 정부는 인디언들을 화학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땅을 조각 내서 나눠주는 사유지화 전략을 썼고, 부족의 신앙을 미개하다는 이유를 대며 탄압했다.
이름도 마찬가지다. '늑대와 함께 춤을' '주먹 쥐고 일어서' 같은 인디언들은 자신의 이름을 씨족이 숭배하는 동식물이나 유명한 전사에서 따온다. 그들은 또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이름을 갖는다. 자신은 누구이며, 자신을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 정말 자신을 나타내주는 '진짜 이름'에 대한 열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모든 이름은 당신에게 새로운 의미와 가능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이름들은 따르고 지키며 살아가야 할 무엇이 된다. 그것은 당신이 이 세상에서 걸어가야 할 방향을 가리킨다"는 인디언들의 사고방식을 저자는 '자신이 발 디디고 있는 땅에서 본향(本鄕)을 체험하려는 의식과 맞닿아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게 이름이 많아도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을 문자로 기록해서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양식 근대 시스템에서는 당연히 곤란한 일이다. 일제강점기 창씨개명과 다를 바 없이 서양식 이름이 인디언들에게 강요되었다.
저자가 인디언들의 역사를 이같이 짚어낸 것은 '개인을 파편화해 모방의 길로 내모는 산업사회의 집요한 공세로부터 토착민을 지켜내려면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사회는 국가보다 오래됐다.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국가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시장경제 시스템에 장악 당한 시장을 되찾아오는 일도 국가가 아닌 사회만이 가능하다.' 연대를 통해 적절한 방어수단을 갖지 않으면 공동 자산과 상호 부조로 운영되는 '국가보다 오래된' 사회의 복원은 요원할 것이라며 저자는 이것이 북미 인디언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 토착민인 바로 우리가 당면한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