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4월 동해을 보궐선거 때 '대쪽' 이회창 중앙선관위원장은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의 당원용 서신이 위법이라고 결론 내리고 경고 서한을 보낸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있으나마나 했던 선관위가 명실상부한 헌법기관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풍토는 마땅히 배격돼야 한다. 이는 유능한 영도자라면 통치권 취득 과정이 어떻든 정당화된다는 논리와 통한다. 선거 과정이 잘못됐다면 가장 나은 후보가 당선됐다 하더라도 무효다."
■ 지금이라면 당연한 조치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전두환 독재정권에 이어 직선제를 통해 집권한 노 대통령의 위세가 대단해, 이 서한은 '역린(逆鱗ㆍ용의 턱밑 비늘)'을 건드리는 행위로 여겨졌다. 집권세력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명분을 쥔 '대쪽'을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 이어진 8월 영등포을 보궐선거는 더욱 혼탁했다. 이 위원장은 모든 정당의 후보를 불법선거운동 혐의로 고발했다. 그러나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그는 위원장직을 사퇴했다.
■ 그런 선관위가 요즘 어용 논란에 휘말리고 있다. 새누리당 손수조 후보의 '3,000만원으로 선거 뽀개기'가 거짓으로 드러나고 손 후보와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카 퍼레이드를 벌였는데, 모두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3,000만원 선거 뽀개기'는 정치 초년생의 의욕 때문에 빚어진 일로 넘길 수 있다 해도 '카 퍼레이드 적법' 결정은 '누구든지 자동차를 이용한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는 선거법 91조3항과 배치돼 거센 비판이 일고 있다.
■ 그러나 선관위는 '통상적인 정당활동'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라는 해석을 내렸다. "국민이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이해한다"는 선관위 관계자의 말처럼 참 희한한 논리다. 이처럼 손수조 후보에 관대한 선관위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의 금품살포 제보는 사실 확인도 안 됐는데 검찰에 통보했다. 지난해 서울시장 보선 때는 조국 서울대 교수처럼 성향이 분명한 유명인은 투표 독려를 하면 안 된다는 코미디 같은 지침을 내린 바 있다. 어째 좀 이상하지 않나?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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