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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그들의 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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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그들의 족구

입력
2012.03.2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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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라는 스포츠가 있다. 족구? 그냥 아저씨들끼리 대충 줄 그어놓고 택견하듯, 춤추듯 슬렁슬렁하는 운동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족구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 발상된 정식 구기 종목으로, 1990년에 협회가 설립되었고 다수의 등록 선수와 실업팀이 존재한다. 물론 올림픽 정식 종목은 아니지만 세팍타크로보다 인지도가 높으며, 핸드볼보다 하는 사람이 많고, 축구에서 꿈꾸는 세계 랭킹 1위는 진즉에 접수했다(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족구를 한 번쯤은 해보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것은 군대 때문이다. 유력한 설에 따르면, 한 공군부대에서 족구가 처음 성행했으며 그것이 전군으로 퍼지고, 결국 대한민국 아저씨들의 대표 레포츠가 되었다고 한다. 미필의 어린 남학생은 갑자기 워커를 신고 엄청난 족구 실력을 뽐내는 선배를 보고서야 '군필'의 위대함을 느끼곤 한다. 축구보다 다칠 염려가 적고, 야구보다 장비가 덜 필요하며, 농구나 배구보다 신체적 영향력이 덜 미친다. 평범하고 평등한 남자의 운동, 족구가 탄생한 배경이랄까.

족구의 규칙은 간단하다. 배구와 유사한 점이 많다. 한 팀이 6명이 되고, 4명이 경기에 나선다. 3세트에 2세트 선승해야 하고 15점을 먼저 따면 된다. 14점에서 동률이 되면 듀스 시스템을 적용한다. 세 번 만에 상대방 코트로 공을 넘겨야 하고, 바운드는 한 번 가능하다. 가끔 논란이 되는 것은 손을 제외한 모든 신체부위를 사용할 수 있느냐, 무릎 아래와 머리만 가능한 것이냐 하는 부분인데, 족구 협회 공식 규칙에 의하면 후자가 맞다. 우리 동네 규칙은 이렇다며 네트를 사이에 두고 싸우지 않길 바란다.

족구를 하는 사람 성향도 참 여러 가지인데, 그것은 보통 포지션에 따라 쉽게 살필 수 있다. 4명이 나서는 경기에서, 2명은 후위에 서고 2명은 전위에 선다. 후위는 수비를 하고 전위는 공격을 담당하는 것이다. 후위의 둘 중에 한 명은 실력은 좋지만 팀의 밸런스를 위해 뒤를 받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화려한 공격이라도 상대의 서브나 공격을 뒤에서 안정적으로 리시브 해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후위의 나머지 하나는 운동실력이 부족하지만 좋은 친구. 게다가 그는 의욕이 넘친다. 가만 서 있으면 좋을 걸 꼭 "마이! 마이!" 외치고는 헛발질하고 겸연쩍게 웃는다. 전위에 한 명은 화려한 공격수. 축구에서는 스트라이커, 공부는 전교 1등, 미팅에서는 킹카가 그다. 다른 하나는 공격수가 공격을 잘 할 수 있게 토스를 해준다. 밥상을 차리는 엄마 같은 존재다.

족구는 참 여러 군데에서 한다. 남자들이 여럿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족구를 한다. 이승기도, 김국진도 족구를 한다. 점심시간 소방차 앞 좁은 공터에서 족구를 하는 소방관 아저씨도 있다. 대학가에서도 족구를 한다. 게으르고 술 좋아하는 남자 선배가 기량을 뽐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된다. 여러 가족이 휴가를 떠났을 때 아버지들이 모여서 하는 운동도 주로 족구다. 공장의 쉬는 시간에도 족구는 안성맞춤이다. 같은 공장에서 같이 땀 흘리던 동료가 왁자지껄한 햇볕 받으며 하는 공놀이라니, 아름답지 않은가. 족구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운동이다.

태준식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당신과 나의 전쟁'을 보면 자동차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시커먼 아저씨들이 나오고 그들은 무언가에 쫓기고 두들겨 맞지만 끝내 당당하고 굳건하다. 그들이 귀여운 아저씨로 나올 때가 있는데 그 잠깐의 컷이 바로 그들이 '족구'하는 장면이다. 나는 잠시 보았다. 일터에서 일하고, 가끔 막걸리 내기 족구도 하고, 그리고 막걸리를 마시고, 집에 가면 아내와 아이가 있는 삶, 그런 삶을. 곧이어 그들의 삶은 부서졌다.

조현오 경찰청장은 자신의 쌍용차 진압을 자신의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삼는다고 한다. 경찰은 그해 사용한 최루액 대부분을 쌍용차에 퍼부었고, 물과 전기를 끊고 약품마저 반입 금지했으며, 이미 쓰러진 노동자를 곤봉으로 내리치며 토끼몰이를 했다. 족구는 그런 게 아니지만, 발음을 과장하여 크게 외치고 싶다. 다, '족구'하라 그래. 해고는 살인이다. 그날 이 말은 은유가 아니었다. 모든 해고 노동자들이 평화롭게 족구하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는 봄이다.

서효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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