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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공포는 안보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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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공포는 안보의 힘

입력
2012.03.2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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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장면. 첫 장면. 2002년 12월 뉴욕 유니온 스퀘어 지하철역 곳곳에서 'FEAR(공포)'라는 흰색 글자를 선명하게 써넣은 검은색 상자 37개가 발견된다. 바로 지난 해 '9ㆍ11 테러'까지 있었던 터라, 사람들은 당연히 그 정체불명의 상자 앞에서 가늠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지하철은 무정차로 역을 통과했고, 뉴욕커들은 끔찍한 테러의 파국적 이미지를 싫어도 자꾸 떠올리며 그 '공포 박스' 앞에서 공포에 떤다.

다음 장면은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2012년 3월 26일과 27일 양일 동안 '2012 서울 핵안보 정상회의'가 열린 삼성동 코엑스 지역이다. 세계 53개국 정상과 4개의 국제기구 수장이 참석하는 만큼 회의장 반경 1~2km는 3선 경호라인이 설정돼 경비는 여느 때보다 철통같다. 또 행사장 외관과 국내외 대기업이 후원하는 각종 의전은 뉴스를 통해서만 봐도 개최국의 높은 수준과 참가국들의 품위가 느껴진다.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들 53개국은 전 세계 인구의 80%, 전 세계 GDP의 약 90%를 대표하는 대규모, 부(富)의 연합체로서 '2012 서울 핵안보 정상회의'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전 세계 평화와 안전을 위해 무기급 핵물질을 제거하거나 최소화하고, 원자력 시설에 대한 물리적 보호를 강화하는 한편, 핵과 방사성 물질이 불법적으로 거래되는 일을 차단하는 등 공공의 윤리이자 전 지구적 현실 차원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를 위해서.

자, 이제 다시 뉴욕 지하철역의 소위 '공포 박스'로 이야기를 돌리면, 사실 그 일은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의 1학년생이었던 25세의 클린턴 보아베르가 학교 과제로 수행한 아트 프로젝트였다. 20세기 후반부터 현대미술은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듯이 작가가 스튜디오에서 열심히 작업한 그림이나 조각을 전시장에 선보이는 방식 위주로 돌아가지 않는다. 대신 작업실이나 미술관을 벗어나, 일상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며 복합적인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회에 예술적으로 적극 개입하는 미술이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일명 '장소 특정적 예술'이다. 보아베르는 담당 과목 선생이 그러한 방향에서 낸 과제를 자신의 아이디어에 따라 실현한 것인데, 결과는 참담했다. 즉 그의 작품은 예술적 개입이 아니라 예술을 빙자한 '공포'의 사적 유희로 귀결된 것이다. 지하철에서 의심스런 상자를 발견한 사람들은 곧 패닉 상태에 빠졌고, 유일한 해결책인 경찰에 신고했으며, 보아베르는 37번째 상자를 놓던 순간 그를 뒤쫓던 경찰에 붙잡혀 후일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뉴욕타임스의 미술평론가 마이클 키멜만은 "뉴욕에서는 예술이 범죄가 되고, 범죄가 예술이 된다"며 '바보 같은 프로젝트'를 한 그 학생을 신랄하게 비난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비판적 반응은 그것을 '실험적 예술'이라는 식으로 옹호하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공공의 안전은 언제나 당연히 개인의 예술적 모험보다 정의롭고, 무엇에 의해서도 훼손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덕 교과서나 미술 교과서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생명의 권리문제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논리는 반박도 회피도 할 수 없다. 때문에 전 세계가 핵 억지정책을 통해서 더 평화롭고 안전한 세상을 구축하자는 대의의 국제회의를 위해, 수많은 샐러리맨들은 차를 놓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고, 회의장 인근 역을 무정차 통과하는 지하철에서 내려 테헤란거리를 떼 지어 걷는 일을 감수한다. 그 풍경 사진은 비범하지 않다. 각국 정상 부인들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찬을 나누는 대통령 부인의 사진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핵무기로 인해 세계가 절멸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핵안보 정상회의 같은 장치를 공공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의 안전을 위해 작동하는가. 십년 전 뉴욕의 치기어린 학생작품과 오늘의 보도사진들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강수미 미술평론가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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