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래트럴 대미지'라는 군사 용어가 있다. 이는 전투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 피해를 뜻한다. 그 규모는 논란거리가 될 수 있지만 콜래트럴 대미지 자체는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용어는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서 발생한 민간 피해를 지칭하면서 우리 귀에 익숙해졌다. 대테러 전쟁에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해도 그것이 치안을 지키기 위한 작전 수행 과정에서 일어났다고 '자체 판단'을 내리면 미 정부는 스스로에게 언제나 면죄부를 부여했다.
2009년 1월 20일 일어난 용산참사를 보수언론과 정부는 콜래트럴 대미지라는 시각에서 바라봤다. 그들은 자신의 거주지를 지키기 위한 철거민의 싸움을 치안을 위협하는 테러 행위로 규정했고 따라서 경찰의 진압작전은 적법한 것이라 강변했다. 실제로 경찰은 농성을 진압하기 위해 대테러 경찰특공대를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농성자 5명과 경찰 1명이 희생됐지만 대법원에서 생존 농성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 정운찬 전총리가 사망자들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책임을 통감한다 했지만, 그의 말은 생존 농성자들에 대한 법원의 유죄 판결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경찰의 공무집행 시기나 방법에 관하여 아쉬움이 있다"고 했지만 어쨌거나 농성자들은 유죄였다. 결국 아쉬움, 유감, 책임통감 운운은 하나마나 한 말들이었다. 그런데 희생자들은 바로 농성자들의 가족이고 동료이다. 사법권력의 논리에 따르자면 농성자들은 자신의 가족과 동료를 죽음으로 내몬 당사자들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것이다.
국가기구는 경찰 진압을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것으로 정당화하면서 농성자들을 '테러리스트', '패륜아'로 정의했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떤 회색지대도 없다. 용산 참사에서 국가가 이성이라면 농성자는 비이성이다. 치안을 위해 이성이 비이성과 싸우면서 발생한 모든 피해는 콜래트럴 대미지이다. 그러므로 희생자들에 연민을 느껴도 만약 사법부의 유죄 선고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안타깝지만 그들의 죽음은 범죄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들의 죽음을 야기한 것은 경찰이 아니라 농성자였다."
그런데 경찰의 진압은 정말 이성적이었을까? 검찰의 주장과 법원의 판결은 이성적이었을까? 최근 개봉을 준비중인 다큐멘타리 영화 '두 개의 문'은 국가기구는 이성적이라는 전제를 뒤집는다. 법정에 제출된 용산참사 관련 증거들, 특공대원의 진술들은 경찰이 남일당의 구조나 당시 상황, 망루에 있었던 발화성 물질에 대한 어떤 정보도, 안전에 대한 어떤 고려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압작전을 펼쳤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작전은 신속한 진압이라는 제1원칙에 따라 진행됐는데, 이 원칙에 따르면 농성자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진압되어야 하는 테러리스트였고 경찰특공대원들은 무조건 명령에 따라야 하는 로봇이었다. 경찰수뇌부의 현장 지휘는 방만했고 안전 대책은 전무했다. 법원에서 검찰은 안전보다는 신속한 진압을 우선시 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경찰의 작전을 옹호했다. 사법부 또한 일방적으로 경찰과 검찰의 편을 들었다. 결국 이들의 이성은 사회의 안전, 즉 치안의 이름으로 특공대원들과 농성자들의 안전을 덮어버렸다. 이들의 이성은 과정의 합리성을 배제한 채, 목표한 바를 향해 질주하는 무자비한 기계장치였다. 이성은 비이성과 폭력으로 탈바꿈했다.
사회과학은 오랫동안 국가를 '능력 있는 행위자', 합리적 이성을 소유하고 작동시키는 조직으로 취급했다. 그래서 어떤 정치학자는 <지식국가론> 이란 책을 쓰기도 했다. 나는 '두개의 문'을 보고 생각했다. 이제는 오히려 '무식국가론'이라는 책을 써야할 것이다. 그 책은 국가가 이성이 아니라 비이성과 폭력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사회를 보호한다는 치안의 명분하에 인간성과 생명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무식한 파괴행위들이 자신의 무식함을 은폐하고 호도하려는 노력들 속에서 더 배가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지식국가론>
심보선 시인 ·경희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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