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여행/ '고래의 추억' 장생포 앞바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여행/ '고래의 추억' 장생포 앞바다

입력
2012.03.28 12:01
0 0

■ 시간을 거슬러 귀신고래 만나는 꿈을 꾸다

석유화학단지의 파이프라인과 조선소의 크레인이 얽힌 실루엣 너머 해가 뜨는 바다. 항구도시 울산은 일찍이 유기(有機)의 세상을 버렸다. 그리고 무기(無機)의 세계관을 체현한 덕에 한반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됐다. 그 대가로 생명의 온기와는 가장 거리가 먼 이미지를 얻고 말았다. 때론 파도의 무늬마저 금속 표면의 광택처럼 느껴지는 곳. 하지만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울산의 바다엔 가장 영험한 생명이 깃들었다. 인간과 자연이 분리된 뒤 자취를 감춰버린 귀신고래가 그것이다. 반구대 암각화에, 신라 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에 등장하는 고래다. 고래잡이의 기억이 얼룩처럼 남아 있는 장생포항. 울산시는 몇 해 전부터 이곳에서 귀신고래의 이야기를 되살리려 애쓰고 있다. 근해에 고래떼가 나타나는 봄이면, 그 이야기를 좇아 사람들이 몰려든다.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생명이 넘치는 바다로 돌아가고픈 여행객들이다.

장생포 앞바다에서, 시간을 한번 거꾸로 돌려봤다.

#1. 1985년의 바다

올해(2012년) 일흔 둘의 전직 포수 김용필씨는 열여덟에 처음 포경선을 탔다. 나무로 만든, 배수량을 톤(t)으로 표기하기 민망한 작은 배였다. 초등학교 나온 뒤 마땅히 할 일이 없어 택한 일이었다. "촌에서 해물 끼(해먹을 것) 없던 시절에 괜찮은 직업"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화장(조리사)에서 시작해 세라(갑판원), 포수에 이르기까지 10년도 더 걸렸다. 그에게 귀신고래는 음력으로 동짓달부터 섣달까지, 바다를 훑고 다녀야 겨우 하나 잡을까 말까 하는 생존의 방편이었다. 귀신고래 한 마리면 선원 열두 명의 임금과 배 기름값을 제하고도 집에 가져갈 게 있었다.

"그기(귀신고래)는 딱 치불(추울) 때, 장지끝(호미곶)에서 간절곶까지 바짝 돌 새로 붙어서 내려오는데, 색깔도 꺼무스룸하고 따개비가 항그(잔뜩) 앉아 있어서 웬만해선 눈에 안 보이는 기라. 그래서 귀신고래라 안 카나. 나가수(장수경) 같은 건 혼자 잡는데 귀신고래를 발견하면 마 깃발을 안 올리나. 그라믄 배들이 우르르 몰리 오는 기라. 우째 나누나 카믄 처음 작살 찌른 배가 1번, 발견한 배가 2번…"

그가 마흔 다섯 되던 1985년은 포수로서 기량이 절정에 이른 때였다. 그러나 이미 고래는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김씨에 따르면 남획도 문제지만 항구의 도시화로 인해 해안에 붙어 회유하는 고래의 서식 환경이 급변한 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고래에 기댄 삶은 하루하루 팍팍해졌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일, 급작스레 포경이 금지됐다. 선사시대에 뿌리가 닿는 포경의 문화도 하루아침에 폐기됐다. 고래잡이들은 공장으로, 선창 횟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유일하게 남은 포경선은 뭍으로 끌어올려져 지금은 장생포고래박물관 옆에 처연하게 세워져 있다.

#2. 다이쇼(大正) 원년의 바다

대한제국이 국권을 침탈당하고 일본의 연호를 쓰기 시작한 지 이태 되던 해, 그러니까 다이쇼 원년(서력 1912년)은 인디아나 존스가 장생포에 도착한 해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같지만 사실이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는 미국의 탐험가ㆍ고고학자 로이 채프만 앤드류스(1884~1960)를 모델 삼아 만든 영화. 중앙아시아와 고비사막의 공룡 화석을 연구하던 앤드류스는 1912년 알래스카를 귀착지로 둔 고래의 회유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일본 포경선을 타고 '악마 물고기(Devil's Fish)'를 추적하던 중 귀신고래를 목격하게 된다.

귀신고래에 매료된 앤드류스는 한동안 조선의 동해안에 머물며 연구했다.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 뒤 1914년 학술지에 관련 연구를 발표하면서, 자기가 본 귀신고래를 '한국계 귀신 고래(Korean gray whale)'라 이름 붙였다. 현존하는 귀신고래는 동북태평양 개체군과 북서태평양 개체군으로 나뉜다. 학계에서 앞의 것은 캘리포니아계, 뒤의 것은 한국계로 불린다. 비록 심각한 멸종 위기에 처해 있지만, 북서태평양 귀신고래가 '코리안'이 된 것은 오롯이 100년 전 인디아나 존스의 공이다. 지난해 장생포에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3. 기원전 4,000년의 바다

울산이 울산이라는 이름을 얻기 전 아득히 먼 옛날, 석기(혹은 청동기) 시대부터 이 지역은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육지의 경계도 달라서 바다가 지금보다 내륙 쪽으로 훨씬 깊었다. 태화강 지류 대곡천으로 가면 석기인들이 남긴 흔적을 만날 수 있다.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가 그것이다. 댐 건설로 이제 일년의 절반 가량 물에 잠겨 있는 그 흔적들을 통해, 선조들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잡은 고래를 목격할 수 있다. 290여점의 그림 가운데 58점이 고래다. 고래의 생김새와 습성, 사냥하는 법 등이 다양하게 묘사돼 있다. 귀신고래, 범고래, 수염고래, 향고래 등을 지금도 구분할 수 있다.

나무와 열매 곡식보다도, 들에 사는 사슴 양 멧돼지보다도, 바다에 사는 거대한 고래의 생태를 상세히 기록한 뜻은 무엇이었을까. 미와 추, 성과 속이 분화하기 전부터 고래를 꿈꾼 석기인들에게 바다는 또 어떤 의미였을까. 반구대에는 14점의 옛사람이 새겨져 있는데, 모로 돌아선 이들의 입은 하나같이 굳게 닫혀 있다. 마모가 심해 이제 가까이서 봐도 표정을 읽어내기 힘들다. 조금 떨어진 곳에 들어선 울산암각화박물관에서 정교하게 복제된 암각화를 만날 수 있다. 조명을 받은 박물관 암각화의 고래는 실물보다 입체적이다.

현대의 기술로 복제한 바윗덩어리이지만,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것은 6,000년 저쪽의 고래들이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면, 고래들이 바위를 뚫고 나와 더 머나먼 과거로 헤엄쳐갈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귀신이 출몰하던 바다가 그 바위 속에 파도치고 있다.

울산=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선사시대 고래잡이 체험해보고 고래떼 마주쳐보고

'고래를 먹자는 축제냐, 보호하자는 축제냐?'

고래축제는 아직 이 굴레에서 완전히 못 벗어난 것이 사실이다. 멸종위기종으로 보호 받는 한편에서 '바다의 로또'라며 고가에 거래되고 있는 것이 고래이기 때문이다. 축제의 지향점은 둘 모두와 거리를 둔다. 울산고래축제의 방점은 '이야기'에 있다.

6,000년 전 선사시대의 기록유산인 반구대 암각화부터 태화강 물줄기에서 생성된 중세기의 설화, 근ㆍ현대 장생포의 흥망성쇠, 미국인 고고학자와 한국계 귀신고래에 얽힌 이야기 등을 엮어 울산의 문화 콘텐츠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 축제의 궁극 목표다. 고래문화재단은 이를 위해 다양한 스토리텔링 방법을 개발 중이다.

26~29일 태화강과 장생포에서 열리는 2012 울산고래축제에서는 다양한 공연, 체험 프로그램들과 함께 고래잡이를 주제로 한 선사문화 재연 행사가 열린다. 귀신고래 회유 해면까지 배를 타고 나가 고래를 관측하고 돌아오는 고래바다 여행선 운항도 증편된다. 세 번에 한 번 확률로 돌고래나 밍크고래 떼를 마주칠 수 있다. 배 위에서 고래문학제, 관광 학술제 등도 펼쳐진다. (052)276-8474.

유상호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