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6시간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한 시간을 덤으로 얻은 싱가포르의 날씨는 후텁지근했다. 동남아시아 말레이반도 끝자락, 적도 바로 위에 자리한 그곳의 기온은 연평균 23~31℃를 오가지만 맑은 날이 많아 수상스포츠나 수영을 즐기기에 좋다. 물론 수상스포츠만을 위해 싱가포르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광요 전 총리 일가의 장기 집권, 동남아시아의 금융 허브, 벌금과 태형 등 엄격한 법률 집행으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나라. 같은 아시아 국가지만 싱가포르에 대한 이미지는 단편적이다. 서울보다 조금 큰 면적의 싱가포르 관광은 하루면 충분하다는 말도 있지만, 한번 가보면 여러 날 여행을 해도 아쉬움이 남는다고 할 정도로 은근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싱가포르 정부가 신 성장 동력으로 복합 리조트 사업을 추진하는 덕에 곳곳이 공사 현장이지만 앞으로 이곳은 더 매력적인 관광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관광객도 몇 년 새 10% 이상 증가했다.
인터넷에서 한동안 회자되었던, 세상에서 하늘과 가장 가깝다는 호텔 꼭대기 수영장을 기억하는지. 싱가포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스카이 파크 수영장이 있는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을 중심으로 한 마리나 베이 지구는 싱가포르 관광의 중심지가 되어가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엄격히 통제되는 싱가포르에서 자유로운 일탈이 허용되는 곳 같다고 할까. 그래서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에 묵지 않더라도 그곳을 찾아 즐기는 관광객들이 많다.
호텔, 컨벤션 센터, 쇼핑몰, 레스토랑, 카지노가 결합된 복합 리조트인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은 최고 52도까지 기울어져 현대판 '피사의 사탑'으로도 불린다. 미국 건축가 모셰 샤프디가 설계한 이곳은 또한 세 개의 건물이 배 모양의 수영장을 머리에 인 형상으로 2010년 완공 이전부터 건축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바로 이 안에 모셰 샤프디가 선정한 7명의 아티스트의 작품 10점이 있다.
'예술의 거리'(Art path)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소개 팜플렛을 가지고 다니면서 보지 않으면 건축 자체가 예술인 이곳에서 작품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좋게 말하면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고 할까. 그럼에도 호텔의 서쪽 외관을 뒤덮은 '윈드 아버'(Wind Arbor)의 존재감은 두드러진다. 예술과 과학의 결합을 시도하는 미국의 설치미술가 네드 칸의 작품으로, 사각형의 작은 알루미늄 판 26만개를 이어 만든 거대한 파사드다.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이 작품은 바람에 일렁이고 빛에 반사되며 잔잔한 호수의 물결처럼 찬란하게 반짝인다.
네드 칸의 또 다른 작품 '레인 아큘러스'(Rain Oculus)도 쇼핑몰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면 카메라를 들이댈 법하다. 이름대로 안구(眼球)의 형상을 한 작품은 중앙에 뚫린 구멍으로 외부의 빗물이 모여 폭포수처럼 떨어진다. 크게 움푹 패인 그 구멍에 소원을 빌며 동전을 던지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모인 수천 달러는 구호기구에 기부됐다고 한다.
세계적인 조각가 안토니 곰리의 '드리프트'(Drift)는 중량감 있는 그의 여타 작품과 달리 호텔 로비 공중에 깃털마냥 떠 있다. 바닥에서 올려다 보면 강철을 얼기설기 용접해 거미줄이나 구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무게는 14.8톤에 이른다.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은 어느 곳에 카메라의 포커스를 맞추든 찍히는 건 모두 작품이 된다. 그러나 호텔 수익의 85%를 차지한다는 카지노를 중심에 두고 설계한 탓에 호텔과 쇼핑몰 사이를 오가다 길을 잃기 십상이다. 예술작품들을 찾아다니는 것도 괜찮지만 이들을 이정표 삼아 보는 것도 좋겠다.
밤이 되면 마리나 베이 지구의 3.5km에 이르는 산책로는 거대한 캔버스로 변한다. 어둑어둑해지면 밤 8시 30분에 시작하는 빛과 물, 그리고 불이 어우러지는 분수쇼 '원더 풀'을 보려는 사람들이 강 주변으로 모여든다. 안개와 불을 뿜어내는 분수도 이색적이지만 분수가 만든 물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 영상은 마리나 베이가 주는 특별한 밤의 선물 같다. 싱가포르 강을 20분간 유유히 운행하는 리버 크루즈를 타면 한층 낭만적인 싱가포르 야경이 펼쳐진다.
내달 1일까지 열리는 빛과 예술 페스티벌 'iLight 2012'는 분수쇼와 더불어 잊지 못할 볼거리다. 마리나 베이 산책로에는 싱가포르, 중국, 호주, 프랑스 등 여러 나라 아티스트들의 빛을 이용한 설치작품 30여 점이 자리해 싱가포르의 밤을 밝힌다. 특히 아트 사이언스 뮤지엄 외벽에 싱가포르 작곡가 이스칸다르 이스마일의 드라마틱한 오케스트라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꽃과 나비의 환상적인 영상 '빛의 정원(Garden of Light)'에는 한동안 눈을 뗄 수 없다.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앞, 연꽃을 닮은 아트 사이언스 뮤지엄 역시 건축가 모셰 사프디의 작품이다. 하얀색 외벽으로, 밤엔 등대처럼 관광객을 맞는다면 낮엔 흥미로운 전시가 발길을 이끈다. 이달 17일 개막한 앤디 워홀의 전시 '영원한 15분'은 8월 12일까지 이어진다. 홍콩, 상하이, 베이징, 도쿄로 이어지는 미국 피츠버그 앤디 워홀 박물관의 아시아 순회전으로 싱가포르가 스타트를 끊었다.
전시는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연대기별로 구성됐다. 유년 시절 그린 드로잉부터 작업실 '팩토리'에서 팝 아티스트로 이름을 날리기까지 시기별 주요 작품을 망라해 회화ㆍ조각ㆍ필름 등 260점에 이른다. 통조림 깡통의 이미지를 거듭 복제함으로써 기성품을 포함해 세상 모든 사물이 예술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캠벨 수프 캔'(1960),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마릴린 먼로 등 대중 스타들을 캔버스에 끌어들인 일련의 실버 스크린 작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말년의 작품도 전시됐다.
국내에도 출판된 바 있는 앤디 워홀의 일기의 엄청난 분량이 보여주듯 기록하고 수집하기 좋아했던 앤디 워홀은 1970년대 자신이 그동안 모아온 아이템들을 박스에 담아 '타임 캡슐'이라 명명했다. 600여 개의 타임 캡슐이 전해지는데, 이번 전시에는 그가 삽화와 광고 제작에 참여했던 패션지 <보그> , <바자> 등 50권이 넘는 잡지와 책이 들어 있는 타임 캡슐 하나를 공개했다. 바자> 보그>
■ 여행수첩
●싱가포르의 63개 섬 중 마리나 베이 지구는 싱가포르 섬 동남부에 있다. 창이 국제공항에서 택시로 30분,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무료 셔틀버스로 1시간 정도 걸린다.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의 스카이 파크 수영장은 투숙객만 무료 이용이 가능해 여기서 1박을 하고 숙소를 옮기는 이들이 많다. 투숙객이 아니면 스카이 파크 전망대에서 싱가포르를 내려볼 수 있으며, 야경을 보기에는 수영장과 마찬가지로 57층에 자리한 클럽 쿠데타도 적당하다. 자세한 내용은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홈페이지(http://www.marinabaysands.com) 참조.
싱가포르=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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